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은 동시집/곽해룡
김륭,『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 문학동네, 2009
바둑을 두어보면 한 판만 두어도 상대 실력이 나보다 고수인지 하수인지 알게 된다. 실력 차이가 크면 한 판을 다 두지 않고 열 수만 두어도 우열이 드러나게 된다. 바둑을 좀 두는 사람이라면 자신보다 고수에게 자세를 낮추고 한 수 지도받길 정중하게 간청하는 것이 바둑 두는 사람으로서의 예의다.
동시집도 바둑처럼 한 편만 읽고도 내가 쓴 동시보다 한 수 위라는 걸 느껴질 때가 있다. 진정성과 상상력이 뛰어난 동시집을 만나면 나는 그 동시집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한 수 배우고 싶어진다. 김륭 동시집『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도 바로 그런 동시집이다. 흔히 동화적 상상력을 앞세운 동시들이 어린이들의 현실과는 전혀 끈을 잇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을 구사한들 상상력의 끈이 어린이들의 손에 잡혀 있지 않다면, 끈 떨어진 연처럼 혼자 공중에 떠다닌다면 그 연이 하늘을 나는 것도 만무하겠지만 하늘을 난다 한들 그런 동시가 어린이들에게 또는 어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김륭 동시들은 하나같이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멀리 달아나’ 있지만 그래서 얼핏 보면 그가 펼치는 상상들이 저 혼자 하늘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연실처럼 가는 끈 한 가닥쯤은 반드시 어린이들의 일상과 닿아 있다. 김륭이 동시에서 펼치는 상상력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604호 코흘리개 새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6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6층으로 코를 훌쩍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고 있어요 훌쩍훌쩍
코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비스킷처럼 감아올린
코가 길을 잡아당기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흘깃흘깃 쳐다보지만
엄마가 타고 다니는 빨간 티코를 감아올릴 때까지
새봄이 코는 길을 잡아당길 거예요
집으로 오는 모든 차들이 빵빵
새봄이 콧구멍 속으로
빨려들고 있어요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 」전문
코흘리개 새봄이가 흘리는 코를 코끼리의 코로 보는 시선이 사뭇 새롭고 그럴듯하다. 어린이집에 다녀왔을 새봄이는 혼자 아파트에 남아 코를 훌쩍거리며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 남은 하루의 일과다. 새봄이가 아파트에 혼자 있을 시간쯤이면 아직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엄마 마음은 자꾸 집으로 끌리게 되는데, 그것은 새봄이가 훌쩍훌쩍 길을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파트에 홀로 남겨진 또 다른 새봄이들이 훌쩍훌쩍 길을 잡아당겨서 저녁이면 모든 차들이 새봄이들이 있는 집으로 당겨지고 있는 것이리라.
밥을 해먹고 사는 나무가 있을 거야 여름이면 씨앗 속에 숨긴 숟가락을 툭툭 지붕 위로 던지는 나무가 있을 거야 누구야! 내다보면 도둑고양이처럼 파랗게 눈을 부라릴 거야 떫은 얼굴로 딴청을 부릴 거야 그러다 가을이면 이 빠진 할머니 찾아 밥이랑 바꿔 먹자 꼬드기며 발갛게 익은 제 얼굴을 내미는 나무가 있을 거야 까치들에게 밥 먹으라고 밤마다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는 나무가 있을 거야
그렇다면 쉿! 두 눈 부릅뜨고 잘 찾아봐
살금살금 남의 밥을 훔쳐 먹는
나무도 있을 거야
-「감나무의 수수께끼」전문
감 씨를 쪼개본 어린이가 몇 명이나 될까? 김륭은 시를 쓰기 위해 감 씨 속이 어떻게 생겼나 쪼개보는 엉뚱한 면도 있다. 감 씨를 반으로 쪼개보면 떡잎이라고 하는지 배젖이라고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꼭 숟가락처럼 생긴 것이 들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감나무가 밥을 떠먹기 위해 감춰둔 숟가락이라고 상상한 것이다. 여름에 감나무가 지붕 위에다 풋감을 툭툭 떨어뜨린 것은 감 씨 속에 든 숟가락으로 밥을 훔쳐 먹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사람들은 감을 먹은 것이 아니라 감나무가 던진 미끼를 문 셈이다. 감 속에는 감 씨가 들었고 감 씨 속에는 다시 숟가락이 들었다. 감을 먹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감 씨 속에서 살금살금 숟가락이 기어 나와 밥을 훔쳐 먹으러 다닐 것이다. 밥을 훔쳐 먹으며 감 씨는 싹을 틔워 다시 커다란 감나무로 자라 까치와 이 빠진 할머니를 위해 모락모락 김나는 밥(홍시)을 지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도 김륭의 손을 거치면 유쾌한 시가 된다. 그러나 그 유쾌한 시의 행간을 헤아릴 줄 아는 독자라면 거미줄에 걸린 고추잠자리처럼 시의 행간에 갇혀서 한참을 파닥여야 할 것이다.
학교에서 영어 학원으로 랄랄라 영어 학원에서 논술 학원으로 랄랄라 태권도장에서 앞차기 한 번 옆차기 두 번 하고 미술 학원 거쳐 피아노 학원으로 랄랄라 나는 착하고 예쁜 고추잠자리 엄마가 쳐 놓은 거미줄에 매달려 랄랄라 얼굴이 빨개지도록 랄랄라 노래 불러요 접히지 않는 날개 파닥파닥 하늘 높이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어요 랄랄라 춤을 춰요
-「고추잠자리 」전문
이 시의 어린 화자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영어 학원으로 논술 학원으로 태권도장,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으로 라랄라 즐겁게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미줄에 걸린 고추잠자리처럼 어른들이 쳐놓은 덧에 걸려 파닥이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어린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돈과 힘이 없어 어른들에게 대응하지 못할 뿐이지 어른들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으면서도 모자란 척 능청을 떨고 있는 것이 어린이가 아닐지. 어린이들이 거미줄에 걸려 파닥이는 구조신호를 어른들은 랄랄라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는 것으로 잘못 읽고 있는 것은 아닐지.
[출처] 곽해룡 동시인의 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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