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서울역으로 가는 다섯 시 첫 기차는 제시간에 출발했다. 광명역, 지나치기만 했지 내릴 일이 없었던 곳이다. 거기서 다시 안산 상록수역까지 가는 걸음이었다. 심훈을 기리기 위해 소설 제목 ‘상록수’를 이름으로 붙인 역. 아침도 이른 시각에 방문한 나를 그녀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가 간수하고 있는 자료의 도움을 받기 위해 무릅쓴 무례였다. 그녀는 지난 연말 그동안 묻혀 있었던 어린이문학가 이영철 선생을 학계에 처음으로 본격 소개했다. 선생은 내가 연구 과제로 삼고 있는 개성 지역 문학인 가운데 한 사람. 서울 개성시민회를 찾아갔을 때, 나 말고 연구를 위해 찾아온 유일한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그녀를 소개받았던 것이다. 이영철 선생은 1909년 개성에서 태어나 향리 교사로 일했다. 전쟁 발발을 앞두고 서울로 월남해서 영면했던 1978년까지 평생을 어린이문학가로, 교사로, 출판인으로 살다 간 분이다. 1930년대 초반부터 동화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던 그의 선친은 이상춘 선생이다. 개성 지역 교사로 기미만세의거 이전에 의기에 찬 노랫말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다 옥살이를 겪었던 한글학자였다. 게다가 개성 근대문학 첫머리에 놓이는 소설가다. 1942년 임오조선어학회박해폭거로 선친은 다시 왜로(倭虜) 감옥에 갇혔다. 선생 또한 왜로에게 붙잡혀 세 해 동안 갇혀 갖은 고문을 겪었다. 대를 물려 한글 사랑, 겨레 사랑, 문학 사랑을 실천하다 겪은 고초였다. 광복으로 서대문형무소를 나왔을 때 선생 앞에는 견딜 수 없을 비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 옥살이 뒷바라지로 매일같이 개성과 서울을 오가느라 경황이 없었던 아내의 손길 바깥에서 사고를 당했던 어린 딸은 다리를 절단한 끝에 마침내 이승을 뜬 뒤였다. 선생은 왼쪽 다리를 쓸 수 없을 심한 장애를 입었다. 오른쪽 다리마저 온전치 못해 두 발을 끌며 절며 다녀야 하는 운명을 짊어졌다. 그럼에도 선생은 문단의 이해관계에는 눈을 닫고 오로지 학교와 글벗집이라는 출판사 사이를 오가며 어린이문학 발전에 골똘했다.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라는 좌우명을 실천했던 셈이다. 남은 것은 백 권이 넘는 어린이, 청소년 관련 저작물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어린이문학사는 이제껏 선생에 대해 지극히 무심했다. 삼대에 걸쳐 교직을 지켰던 맏아들조차 선생의 뜻에 따라 사후 어떠한 사회적 보훈도 넘보지 않았다. 늦깎이 어린이문학 연구가인 그녀가 본격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묻혀버릴지 모를 분이었다. 일 년에 걸쳐 조사를 하고 논문을 준비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노라고 부끄러운 듯 덧붙이던 그녀의 말은 부풀림이 아닐 것이다. 강원도 시골에서 중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던 그녀다. 여상을 졸업한 뒤 이저리 가파른 세월을 따르다 쉰 줄에 박사과정에 들어선 평범하지 않은 굽이를 지닌 이가 아닌가. 선생의 삶을 되짚으며 흘렸다던 눈물이 더욱 귀한 까닭이다. 되로 퍼내면 그만일 문인을 말로 부풀리고 짓까불리면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요즘 세상이다. 그녀는 우리가 내버렸던, 우리 문학사의 커다란 뒤주 하나를 찾아냈다. 그 속에 가득한 알곡의 뜻과 빛이 어찌 이영철 선생 한 분의 것으로 그칠까. 경남만 하더라도 선생에 버금갈 이가 왜 없겠는가. 경기도 안산 상록수역에서 5분 거리 17층 아파트 맨 위층에 한 사람이 산다. 이름은 박금숙. 이영철 선생의 삶과 문학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거듭할 ‘젊은’ 연구가다. 그녀의 노력은 더 많은 이영철들을 되살려내는 든든한 대들보가 되리라. 상록수역을 나서 애써 광명역까지 배웅해 준 그녀와 헤어져 내려오는 서울부산철길 가까이로 내내 때아닌 봄빛이 가득했다. 박태일(시인·경남대 교수) |
-경남신문.hwp
0.07MB
'메인코너 >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짜 고한승의 사진 (0) | 2013.08.10 |
---|---|
뉴스-박금숙 총장상 (0) | 2013.08.10 |
건국대 대학원 졸업식 때 총장상 받음 (0) | 2013.08.10 |
제19회 한국아동문학학회 정기 가을학술대회 안내 (0) | 2012.10.14 |
컴퓨터 사용 (0) | 2011.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