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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말하기-평론

숲속니라 2011. 3. 3. 01:43

 

 

-아동문학말하기에서 퍼온 자료-(고요님)

첨부파일 아동문학비평사(2010 4월 증보).hwp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개원식 기념 학술발표회(2010. 4. 24)

 

한국아동문학비평사 시고(試攷)

I. 시기의 구분

햇볕도 못 받고 자라, 길게 줄기만 뻗어 잎도 꽃도 보잘것없이 여리기 짝이 없는 오이 덩굴 같은 한국 아동문학 비평의 발자취지만 그래도 문학사적 꼴을 갖추기 위해서나 글의 체계를 위해 다음과 같이 시대 구분을 해 본다.

1950년 6월을 기점으로 일단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전기를 다시 ‘비평 맹아기’와 ‘오욕 수난기’, 후기는 ‘비평모색기’, ‘기초형성기’ 및 ‘비평전문화기’로 이름 붙여 구분해 보았다.

흔히 문학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사를 엮는 데 있어서 광복(光復)의 해(1945)가 거의 절대적 기준점이 되고 있다. 매우 자연스럽고 근거 있는 기준 선정이다. 아동문학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구분에 근거 있는 특별한 반론이 없는 한 아마 이러한 시대 구분법은 우리의 근대사 내지 현대사가 좀더 축적되기까지 당분간 변화가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아동문학 비평사는 아동문학사의 범주에서 검토하려면 마땅히 이러한 구분에 순응하는 것이 또한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 논고는 이 자연스러울 성 싶은 시대 구분법에 따를 수 없다. 대충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일제 시대에는 아동문학 비평이라는 작업이 전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주 미미했었다. 그리고 광복에서 6.25까지는 불과 5년밖에 안 된다. 이 시기는 민족적 혼란기여서 역사 공백기나 다음 없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논의거리가 극빈 상태라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래도 다소의 논의거리가 나타나기 사작하는 것이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이기 때문이다.

둘째, 또 일제 강점기든, 광복의 시기이든 비록 미미한 논의나마 있었다면 그 논의들은 주로 좌익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즉, 1920년대 후반 5,6년간 존재했던 카프의 논리를 주창하는 비평활동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잠복했다가 광복과 더불어 그대로 솟구쳤으나 그것은 20년 전의 것을 온전히 재탕 반복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재탕 반복한 시기가 바로 5년간의 해방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해방공간은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흐름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해방 이전의 현상을 복구하고 연장한 성격이었으므로 이 시기가 앞의 시기와 분리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셋째,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반도는 삼팔선으로 분단되었으나 남북간에 교류나 왕래가 아주 막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쟁과 더불어 반도는 완전히 남북으로 나뉜 채 60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따라서 1950년 이후는 남북이 완전히 별도의 사회적, 문화적 업적을 쌓아 왔던 바 아동문학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6.25를 기점으로 그 전후의 문학적 상황이 판이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대 구분은 1950년을 변화의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2. 비평사 전기

2-1 비평의 맹아기(1908-1925)

비평사의 전기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소년(少年)》이 창간될 때부터 6.25 전쟁이 있었던 1950년까지 40여년의 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문학 비평의 맹아라 할 수 있는 작문 운동이 《소년(少年)》과 소파(小波)의 《어린이》에 의해 청소년을 상대로 한 계몽적 문화 운동으로서 시작되고 전개되었다.

청소년들로부터 투고 받은 글을 꼲고 평가하였으며, 첨삭하여 잡지에 게재하였다. 이를 통하여 문장의 구어화와 우리 생활 언어로 된 새로운 동요시 형식과 율격의 계발 등이 강화(講話) 형식으로 또는 심사 소감으로 반복 강조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점차 문예 이론적 접근의 실마리가 되고 아동문학에 대한 논의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작문 교육적 논의는 아동문학 비평의 맹아가 되었다.

《어린이》와 《신소년》이 간행된 지 거의 2,3년이 지나면서부터 작문 교육은 두 갈래로 발전한다. 한 갈래는 문예 또는 문학의 지도론 내지 교육론에 해당하는 것이고, 또 한 갈래는 투고 작품이 위주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작품까지 평하는 평가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후일 프로 문학가들에 의해 동심 천사주의로 매도되기에 이르는 소파는 이미 이 무렵 색동회의 회원으로 같이 활동하면서 가깝게 지냈던 마해송(馬海松)에 의해 눈물주의라는 말로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문학은 정의의 구현을 위한 불굴의 용기와 저항 정신을 키워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소파의 부음(訃音)을 듣고 그에 관하여 쓴 글에서 마해송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방군과 우리들(주로 색동회 회원)은 근년에 와서 오히려 상반하는 사이에 있었다. 우리는 여전 두터우면서, 방군의 《어린이》 편집 방침, 아동 지도 방침에 대하여는 우리는 오히려 대립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말하자면, 영웅주의와 눈물주의를 극력 배척한 것이다. ……꽃과 벌과 천사와 공주의 꿈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와 눈물만 줄줄 흘리게 되는 애화(哀話)만이 아동의 정서를 보육(保育)함이 아니라 ……세상에 일명(一命)을 타고났으나, 세상을 행복하게 할 의무와 그 행복을 받을 권리를 위하여서 물불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2-2 오욕의 수난기(1925-1936)

20년대 후반에 이르자 이러한 작품의 비평은 뒷날 서평의 맹아라 할 독서 안내에서부터 주제(主題)와 이상에 대한 논의로서나 아동문학의 존재 이유를 묻는 아동 애호 주장, 작품 표절 시비와 같은 단편적이지만 전례 없이 상당한 논의들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아동 잡지들이 창간되면서, 이 무렵 이 나라 안팎에 소용돌이 친 사회주의 운동이 아동문학계도 여지없이 흔들어 소위 ‘프로 아동문학론’이 문학 비평의 중심이 되었다. 결국 이 나라의 아동문학 비평은 이른바 사회주의 운동의 한 가닥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문학 이론’은 으레 무산계급론(無産階級論)의 깃발‘이 되었다.

안준식은 1926년 《별나라》를 창간하여 무산 아동을 대변한다는 기치를 세웠다. 이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아동문학가들 가운데 특히 이기영, 박세영 등이 주로 이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 이구조와 김태오의 존재는 이러한 일반적 흐름을 역행한 특이한 존재였다고 하겠다. 이들은 다같이 동심주의를 옹호하며 계급주의 문학 이론에 반대하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중과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심주의적 반이념적 문학은 이론의 지원 없이도 끊임없이 창작품이 생산되고 있었다.

계급주의 작가들은 언제나 이론가에 의한 이론을 따라서만 활동하였으므로 작품 활동에 앞서서 이론이 앞서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동심주의 문학과 작품을 매도할 때, 희생양으로 내세우는 소파를 공박하면서 마해송의 이른을 왜곡하여 인용하였다. 당시의 비평은 비평의 대상자에 대해 내리깎는 것이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어떤 합리적 이론에 근거하거나 전제하기보다 감정적 인상 비평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평소 인간적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을 상대로 인격적으로 헐뜯는 글도 흔했으므로 비평에 대한 고약한 이미지를 뒷날까지 남겼다. 말하자면 이 시기의 비평은 원시적 단순성과 원색적 발언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을 뿐, 비평 그 자체가 문학적으로 인식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일본의 글을 ‘촌분(寸分)의 설명이나 주석을 보탬도 없이 자기의 것인 양 번안(飜案), 도용(盜用)하여 발표하는 등 상식 이하의 행위’도 자행된 것으로 연구 조사되고 있다.

이런 오욕(汚辱)의 비평도 30년대 말부터는 일제의 말기적 발악으로 모든 민족 문학과 함께 말살 당하고 수난의 시기를 맞는다. 문학 이론은 일문(日文)으로 발표되는 황민화(皇民化),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군(皇軍) 찬양으로만 존재하는 식민정책 합리화의 선동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 숨 막히는 5, 6년의 세월은 암흑과 수난의 터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김태오가 1931년 ‘조선동요연구회’를 조직하여 동요의 보급과 더불어 동요 비평활동을 전개했던 일은 이 시기의 참으로 돋보이는 귀한 활동이 아닐 수 없다. 그 회원들은 7.5조로만 기울어진 형식과 감상적 경향을 경계했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이 나라 아동문학 비평은 30년대말 일제에 의해 단절되었던 프로 문학 운동으로 즉시 재연되었다. 이때도 소위 순수문학이나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반이념 문학은 이론의 옹호 없이도 창작 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문학 이론가란 곧 좌익 이념 주창자를 뜻하다시피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문학적 논의는 2, 30년대의 이념적 태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목청을 높인 투쟁적 집단 운동으로 가열화되고 있었다.

송완순, 양미림, 윤복진, 류두응, 박아기, 이주홍, 이원수 등에 의하여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과 그들의 혁명을 찬양하거나 계급주의 이론을 대변하는 등, 문학 이론이라고 하기보다 정치적 이념적인 주장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에 의한 문학적 논의라고 한다면 소위 ‘동심천사주의’에 대한 매도를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이념에 붙좇지 않는 아동문학가들을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그러한 중에 동시의 현실적 주장, 문학과 교육 등을 주제로 한 이론도 발견되는 것은 그나마 자위할 일이었으며, 특히 감성적 비논리성을 극복하려는 진지한 글들이 더러 나타났었던 점은 돋보인다. 그러다가 이 나라는 6.25 전쟁을 맞게 되고, 문학의 풍토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환을 강요당하게 된다.

 

3. 비평사 후기

3-1 비평의 모색기(1950-1967)

3-1-1 50년대의 의미

1950년 6월의 민족상잔은 반도의 남북을 철저히 갈라놓았다. 즉, 반도 남쪽은 정치 사회적으로 철저한 반공 이념에 따른 왕강한 질서가 확립되었고, 북쪽은 철옹성 같은 폐쇄적 1인 독재체제를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따라서 양측 어느 쪽도 추호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삼엄한 대결 속에 민족의 모든 활동과 교류는 완전 단절 상태로 굳어지고 말았다. 단순한 불통의 상태가 아니라 상호 적대적 분위기였기 때문에 끝없는 증오심 고양과 다지기로써 상대를 무시, 비판, 적대시, 상대의 흔적 없애기 등으로 대처했다. 찬사나 긍정적인 평가는커녕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북으로 넘어가거나 피랍되어간 문인과 인사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금해졌고 교과서를 비롯한 온갖 출판물에서 삭제되고 사라졌다.

전쟁 이전 것은 거의 완전히 파괴. 훼손, 상실되어 모든 것을 거의 맨주먹으로 새로이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있었다. 물질적 재산 뿐 아니고 문화유산도 파괴되어 정신적 전통의식마저도 파괴될 위기에 이르렀다.

온갖 가치의 척도는 반공(反共)과 함께 반일(反日)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 되었다. 즉, 공산주의 뿐 아니고 일본에 관한 것도 가르치거나 언급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 이후의 문학사는 마땅히 남북을 통틀어 비교하거나 병행하여 기술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있다.

2천년대에 이르러 북쪽 상황이나 관련 정보에 대해서 접근이 가능한 루트가 극도로 제한적이기는 하나 실낱같이 열리고 있어서 아주 조금씩 그야말로 야금야금 입수되고는 있지만 아직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불충분하다.

그래서 필자의 능력으로 남북을 비교하면서 이 시대의 비평 상황을 살피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유감스럽지만 가능한 반도 남쪽의 아동문학 비평의 자취를 더듬어 정리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다.

 

이른바 50년대. 20세기의 한복판.

반도 남쪽의 문학은 전후파(戰後派)의 새로운 젊은 작가군을 탄생시키며 전쟁 이후의 문학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동문학계에서는 성인 일반 문학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전후파다운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는 탄생하지 않았다. 프로 계통의 아동문학가들 대부분이 월납북해서 생긴 공백을 월남 아동문학가들이 상당히 채우기는 했지만 그들 중에는 비평가는 없었다.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아동잡지 《소년세계》, 《새벗》, 《학원》등이 태어난 것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그때의 상황을 이해할 때 기적같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잡지의 탄생은 읽을 거리도 볼거리도 없는 당시의 어린이들에게 독서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었고, 아동문학은 이로 인하여 연명의 수준을 넘어 새로운 불길을 지피는 확실한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아동문학 작품이 속속 발표되고 있어도 비평의 무풍지대인데다가 문필 활동이 가난한 피란 살림의 유일한 수입원이 되는 판이라 작품은 곧 화폐로 교환이 쉬운 통속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문필로써 연명하는 또 다른 길은 국시(國是)를 선양하는 선전 매체로서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즉, 멸공 통일 지향의 주제, 국군의 사기 선양의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군가풍의 동요시와 전쟁 영웅담과 북한과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에 기초한 멸시와 비방, 폭로와 비참했던 북쪽의 삶과 피란의 고달픈 삶을 소재로 한 동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가족 이산으로 인하여 고아가 되고, 고아원의 삶을 슬프게 그린 비극적 동화들도 흔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비판 비평하는 기능은 완전 실종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사태가 이론의 주류를 이루던 계급주의 논객들이 일시에 사라져 버려 이 사회의 제1차적 공적(公敵)을 찬양하거나 그 사상을 유포하는 일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이야깃거리가 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이 땅의 문학가가 비평에 대해 가진 인식이 크게 그릇되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즉, 그 시대의 비평은 계급주의 이념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은연중 몸에 배어버렸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반대로 비평은 서로 논쟁을 벌릴 상대가 있어야 발전할 텐데 그 상대라는 것은 오로지 프로 문학가일 뿐이라고 여기다가 그들이 스스로 사라져 버렸으므로 경쟁의 상대를 잃어버린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보면 호구지책으로서 문필 활동에서 비평이란 일단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동잡지에 비평을 다루지 못한다면 신문이나 문학 전문지가 있어서 지면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매체나 지면이 없었던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50년대 초는 비평의 공백기가 된다. 즉, 비평사 전기와 후기 사이가 되는 50년대 초는 바로 연극의 제1막과 제2막 사이의 막간과 같은 비평 휴지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몇해의 공백기가 지난 후, 휴전이 되고 서울이 문화의 중심으로 제자리를 잡아가게 된 5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신문을 중심으로 한 해 한두 번 정도 개괄적 정리 형식의 시평(時評)이나 연평(年評)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이때의 필진은 강소천, 윤석중, 김상옥, 이원수, 최요안, 마해송, 한정동, 임인수, 김성도, 김요섭 등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비평이라기보다 그저 문단에 대한 반성이나 비평적 소감의 글이라고 해야 할 것들이었다. 이때 주된 논점은 아동문학의 통속성과 사이비 작가, 반민족적 과거를 지닌 작가에 대한 지적과 비판들이었다. 이 시기에 특히 눈에 띄는 논쟁은 1958년에 발표된 마해송의 장편 「모래알 고금」을 두고 김요섭이 썼던 시평이 빌미가 되어, 동화에서 연애 문제를 다룰 수 있겠는가에 대해 이원수와 벌인 시비였다.

 

3-1-2 《아동문학》과 1960년대

그러다가 60년대 들어서면서 점차 정리된 논리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1962년 10월, 강소천, 김동리, 박목월, 조지훈, 최태호 등이 편집 동인이 되어 배영사에서 이 땅에 처음으로 아동문학의 이론과 비평을 위한 전문지 《아동문학》을 비정기 간행물로 창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아동문학이란 무엇이며, 그 장르에 관해서 토론하는 등 매 호 기초적인 주제를 특집으로 다룸으로써 아동문학 그 자체의 존재와 행위의 의미부터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80쪽 안팎의 팸플릿 같은 이 잡지는 창간호(1962. 10. 10 발행)부터 6호(1963. 6. 10 발행)까지 매호 특집으로 지상 심포지엄을 실었다. 한 사람이 주제 논문을 쓰고 몇 사람이 보조적 소감을 곁들인 형태였다. 「아동문학이란 무엇인가」(창간호, 주제 발표 김동리), 「동화와 소설」(2호, 주제발표 강소천), 「동요와 동시의 구분」(3호, 주제발표 박목월),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4호, 주제발표 최태호), 「아동문학의 문제점」(5호, 주제발표 백철), 「아동문학의 방향」(6호, 주제발표 이원수) 등을 다루었다.

그런데 이 잡지의 주요 편집 동인인 강소천이 1963년 5월에 세상을 떠나 그 해 6월에 나온 6호는 소천에 대한 추모 특집이 꾸며졌다. 이 특집에서 최태호의 「소천의 문학」이 소개되었는데, 그 원고의 끝에 ‘1960년 구고(舊稿)’라고 밝히고 있는 점으로 보아 소천의 생존시 이미 다른 데 발표했던 글인 것 같다. 당시로는 희귀한 작가론인 셈이다. 그러나 이 글도 글을 쓴 이와 작가와의 관계를 비롯해 작가의 인간적 측면을 함께 다룬 평전에 가까운 글이다.

이 잡지의 7호부터는 체재가 다소 변하여, 심포지엄 특집을 버리고 이슈에 따라 매 호 특집을 달리하거나 기고해 온 무게 있는 평론을 중심으로 엮어나가고 있다. 매 호 평균 2, 3편 정도의 아동문학에 관한 논문, 좌담, 합평 등을 실렸다.

「내가 걸어 온 아동문학 50년」(7호, 한정동), 「외국 동시 감상」(7호, 유경환), 「동화 창작 태도」(8호, 김영일), 「아동문학의 전망」(8호, 최인학), 「초창기의 아동 잡지」(8호, 어효선), 「동화시를 말한다」(9호, 좌담-김요섭 외 5인), 「반향 없는 문학에서 탈피」(9호, 박홍근) 등을 발표하여 1969년 5월까지 8년 동안 19호를 냈다. 초기는 평균 2개월 정도의 간격으로 발행되다가 마지막에는 한 해 두 권밖에 안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잡지는 60년대에 아동문학에 대한 이론을 수렴하거나 논의를 일으키는 유일한 매체 구실을 해 냈었다. 이 잡지의 필진으로 김동리, 강소천, 최태호, 조지훈, 박목월, 윤고종, 곽종원, 조연현, 어효선, 백철, 장주근, 홍이중, 이희복, 이원수, 이주홍, 김영일, 최인학, 김요섭, 박경용, 이재철, 이준구 등이 활동했다. 이 중에서도 일반 문학 전문 비평가인 백철과 홍이중, 민속학자 장주근 등은 이색적인 필진으로 오늘날 아동문학전문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되고 있다.

어쨌든 인신 공격, 비난, 이념의 깃발 노릇이 아니면, 일제 식민 정책의 합리화 내지는 미화의 도구로 전락했던 비평을 60년대의 잡지《아동문학》은 비평에 대한 인식과 필요성을 계몽하고, 비평을 위한 정지 등으로 얼룩졌던 비평의 궤도를 바로잡은 공을 높이 팡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아동문학 문단은 좌우 이념과 관계 없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그룹을 형성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두 개의 그룹은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한 순수 문학적 입장의 아동문학가와 나중에 이원수를 중심으로 사회 참여적 입장을 나타내게 된 아동문학가들이다.

이원수는 이미 《아동문학》에 관련된 일군의 시인, 작가와는 별개로 독보적인 창작과 이론 전개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해방 직후부터 프로 문학에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전개한 이념성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논리를 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아동문학》보다 일반 문학지였다. 이는 연령적으로 40대 후반에 이르러 벌인 열정적인 활동으로 아동문학 문단의 중진급에 들어서게 된 강소천, 이원수 두 작가의 첨예한 대립이 빚어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자유문학》35호(1960)에 「동요와 동시의 개념」,《문학시대》창간호(1966)에 「아동문학의 문제점」을 비롯하여, 《사상계》181호(1968), 《현대문학》24호(1965), 《월간문학》창간호(1968) 등에서 원론적인 성격의 글들이 산견된다. 그 중에는 「해방문학 20년」의 아동문학 편을 맡아 아동문학사의 정리를 시도한 것도 있다. 교단 월간지《교육자료》에 「아도문학 입문」을 거의 1년(1965-1966)에 걸쳐 연재하며 제목 그대로 입문적 이론을 펼치기도 했다.

 

3-2 기초형성기(1967-1976)

3-2-1 시기의 특징

이 시기는 아동문학을 위한 비평과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그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괄목할 만한 업적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아동문학의 비평을 위한 기초가 본격적으로 다져지게 되어 다음과 같은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①아동문학도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연구의 업적도 크게 이루어졌으며 이는 비평 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②몇몇 논리적 아동문학가들이 집중적으로 개성적 신념을 설득력 있게 논리를 전개하여 본격적인 비평의 기초를 닦았다.

③서민 문학론이 등장하면서 열도 높은 논쟁이 전개되었다.

④질적으로 탁월한 문학 연구서와 비평집 및 아동문학 비평 전문 무크지가 간행되었다.

 

3-2-2 아동문학의 연구의 시작과 전개

우리 나라 아동문학 연구는 현대 아동문학사를 육당(六堂)으로부터 기산(起算)했을 때 거의 60년이 지나서야 기초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1960년대 전국적으로 초, 초등 교원 양성 기관인 사범학교를 초급대학으로 개편한 교육대학이 설립되었다. 이는 아동문학이 문학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즉, 교육대학의 교육과정에 아동문학이 설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 교육대학에서는 나름대로 다급한 교재 마련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연구를 하려고 보니 이 분야의 연구나 비평적 업적과 자료가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되고 당황하게 된다. 그야말로 황무지를 개간하듯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아동문학 연구에 임해야 할 입장이었다.

이러한 연구 분위기에 부응하듯이 1962년, 윤석중의 「한국아동문학소사(韓國兒童文學小史)」와 「한국아동문학서지(韓國兒童文學書誌)」가 발표되었다. 또 어효선이 스스로 오랫동안 수집한 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초창기 아동잡지」와 「아동문학사연표(兒童文學史年表)」를 1964년에 소개하여 연구의 근거가 될 자료의 소재와 근황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집필자들의 기억력에 기초한 문단 회고에 가까웠고 소개된 자료도 연구를 위한 그야말로 순수한 기초 자료의 소개일 뿐으로 선행 연구 자료는 물론 아니었다. 기초 자료는 연구를 위해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이기는 했으나 대학의입장에서는 학생을 상대로 미흡한 교재를 가지고 우선 강의를 진행시켜야 했으므로 그 고충은 족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1964년 11월, 대구교육대학의 이재철(李在徹) 교수는 스스로 마련해 사용하던 강의 노트를 정리하기 전에 점검하는 「한국현대아동문학사 시고(韓國現代兒童文學史試攷)」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어 아동문학을 공부하려는 학도를 위한 이론적 기초가 될 입문서와 개론서들이 잇달아 간행되기 시작했다.

이원수의 『 아동문학입문』, 김요섭에 의해 미국 여류 아동문학가인 L.H 스미스 여사의 『아동문학론』이 번역 소개되었고, 이재철 교수의 『아동문학개론』(문운당, 1966)이 그러한 것들이었다.

그 중 『아동문학론』은 당시 불모지의 영역이었던 문학 연구와 비평을 위한 유일한 가이드 구실을 한동안 해 냈다. 그리고 잇달아 나온 『아동문학개론』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논의와 업적을 망라하고 정리하여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벅찬 작업의 성과로 평가되었다.

그 이후에는 아동문학을 위한 연구서가 계속 출간되어 아동문학의 탄탄한 발전을 예고했다. 박종구의 『동화의 이론과 실제』(1974), 석용원의 『아동문학 개설』(1974), 박화목의『교사를 위한 동시 교실』(1979), 박순식의『아동문학의 이론과 실제』(1985)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대부분 저자 자신이 강의하는 전문대학의 유아교육과 교재로 쓰기 위하여, 어떤 것은 문고본으로 된 기술 교양서로, 심지어는 교회의 구연 동화교사를 위한 해설서이거나 길잡이 책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렇다해도 이러한 문학 이론 연구의 분위기는 이전에 볼 수 없던 이 시기의 긍정적 특징으로서 이후에 전개될 비평의 착실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3-2-3 李在徹의 『兒童文學槪論』

이재철(李在徹)은 한국 아동문학 연구와 비평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무지한 상태의 한국 아동문학의 학문적 연구와 비평을 위하여 평생을 초지일관하여 개척해온 그의 업적은 말 그대로 한국아동문학의 학문과 비평의 선구자요 아버지라고 해도 된다.

논저『아동문학개론(兒童文學槪論)』은 한국 아동문학 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아동문학 이론서이다. 그의 아동문학에 관한 많은 저작물 중에서『아동문학개론(兒童文學槪論)』은 『한국현대아동문학사(韓國現代兒童文學史)』(1978, 일지사), 『세계아동문학사전(世界兒童文學事典)』(1989) 및『남북 아동문학 연구(南北兒童文學硏究)』(2007)와 함께 4대 업적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기념비적 저작이다. 이는 1967년 문운당에서 펴낸 초판과 1983년 서문당에서 낸 개고판(改稿版)이 있다. 초판이 나온 이래 현재 거의 40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이를 능가하는 이 방면의 저작이 나타나지 않고 있음은 누구도 감히 흉내내기 어려울만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곧은 문학관과 이론으로써 정치(精緻)하게 정리한 저작이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래로 아동문학 강의에서 경전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나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저자는 개고판 머리말에서 ‘우리 아동문학의 역사도 신문학사(新文學史)와 함께 시작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이론서 하나 없는 문자 그대로 적막강산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엄연히 작품은 쓰여지고 있었고, 2세 교육은 해야만 했다. 이론 없는 아동문학, 역사 없는 아동문학이란 한 마디로 나침반 없는 항해와 다름이 없었고 망망한 대해를 일엽편주로 건너는 거와 같았다.’고 nf회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도 아동문학을 위한 나침반으로 오로지 이 한 책에 머물러 있다시피 한 형편이다.

그래서 이 개론서는 아동문학의 장르론, 작가론, 작품론에 아동문학사까지 수용함으로써 명실공히 아동문학을 학문의 차원으로 자리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 확실한 근거가 되었다. 그것은 물론 단순한 입문서는 아니며, 외국의 가이드북을 번역한 것과도 이미 비교가 될 성질이 아니다.

 

3-2-4 백가쟁명(百家爭鳴)

이 시기(1967-1976)는 아동문학 연구와 함께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비평이 전개되던 시기이다. 그 이전에는 일방적인 이념적 주장과 선동에 일관하면서 그 이념의 잣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매몰차게 내몰아치던 것과는 달리 문학에서의 미학적 관점에 입각한 잣대로써 상호간에 공방적 토론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동문학이 일반문학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식 문학의 반열에 있지 못하는 원인을 캐내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기회만 있으면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돋우는 이론을 전개했다. 아동문학이 서야 할 자리를 새삼스럽다 싶을 만큼 천착해 들어간 것이다.

60년대 문단의 공기(公器) 구실을 하던 《아동문학》은 60년대를 마감하는 1969년 5월에 폐간하고 말았다. 모처럼 존재하던 아동문학을 휘한 유일한 논의의 창구는 문단에서나 아동문학가들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시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아동문학을 휘한 비평적 논의는 일부 일반 문예지들이 1년에 한 번쯤(대개 5월호) 아동문학 특집을 꾸며 줄 때나 나타날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이 시기에 비평의 열기가 중견 시인, 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일어나 마침내 70년대로 접어들자 아연 문단의 분위기가 돌변하여 뜨거운 논전들이 봇물터지듯 활기 있게 전개 되었다.

그 대표적 논객들은 박경용, 임헌영, 오규원, 김요섭, 이상현, 유경환, 이오덕 등이었다. 이들은 제각기 신문과 잡지에 월평, 연평들을 발표했고, 그러한 평들이 빌미가 되어 뜨거운 논쟁에까지 이르게 되었었다.

1970년 전후 2, 3년 간은 아동문학 월평의 시대라고 일컬어도 괜찮을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신문, 잡지마다 아동문학 월평을 다루었기 때문에 이 이후의 비평 발전에 큰 디딤돌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아동문학에 대한 연평(年評), 월평(月評) 들이 불과 2, 3년 동안 바짝 유행처럼 취급되다가 일제히 외면 당한 것은 바로 문학외적 요인이랄 수 있는 문단의 분열과 상호비방의 이전투구의 양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참으로 좋은 기회를 스스로 망그러뜨린 불행한 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무렵 월평을 다룬 주요한 잡지와 필자를 살펴보면, 1969년 신년 벽두에 창간한 월간 《횃불》, 《새벗》, 《현대문학》, 대구 매일신문 등에 박경용(朴敬用), 《교육평론》에 오규원, 《현대문학》에 이재철(李在徹) 등이 맡고 있었다.

특히 60년대말, 동시도 문학인 이상 시로서 우선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플라스코 속의 형성」(《아동문학》16호/ 1968년)을 발표한 이래 거의 4, 5년간 집중적으로 비평의 글을 발표해 온 박경용(朴敬用)이 재기 넘친 이론과 종횡무진한 독설은 당시 아동문학 문단의 시선과 화제를 모았다.

이재철(李在徹)은 문학 연구의 업적을 바탕으로 학문적 입장과 민족 문학적 이념을 씨와 날로 하여 객관적인 평론을 전개함으로써 평론의 정도를 보이겠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일반 시를 쓰는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지만 아동문학 이론가로서 대내외적으로 그의 명성을 굳히고 있었다. 다른 논객들은 주업이 창작이었지만 그는 오로지 학문적 천착과 비평으로써 아동문학에 관여하여 비평 전문인으로서 위치를 정립한 최초의 아동문학가가 되었다.

이오덕(李五德)은 일본의 생활작문 운동의 영향을 받고 그 이론을 그대로 학교 현장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실천하면서 문학적으로는 이원수와 뜻을 같이하고, 《창작과비평》과 연결이 되어서 서민 아동문학론 치열하게 전개했다.

김요섭(金耀燮)은 홀로 무크지 《아동문학사상》을 발간하는 한편, 아동문학 중에서도 특히 동화의 환상(판타지)에 대한 예술적 문학성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L.H 스미스의 『아동문학론』(1966, 교학사)을 번역하여 내기도 하며, 동시와 동화를 창작하는 한 편 논쟁보다도 아동문학 본질에 차분히 천착하는 평론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이들은 비평의 태도에 있어서 확연히 다른 개성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단단한 논리와 해박한 문학 이론을, 다양한 자료, 열정적인 독서에서 비롯된 제각기 다른 신념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펼쳐 놓아 모처럼 아동문학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도 예술 지상주의적인 열정적 논객인 시인 박경용과 이념적 바탕이 참된 문학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서민문학론자인 이오덕 그리고 전통적 민족문학의 입장을 냉정하게 펼쳐 보인 이재철의 학문적 논리가 서로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후일에 기록될 유명한 논쟁들을 남기게 되어 이 시기의 비평사를 풍요롭게 하였다.

논쟁의 핵이 된 서민문학론은 1974년 여름, 한국아동문학가협회의 세미나 주제로 부각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오덕을 중심으로 하여 직-간접적으로 벌어진 일련의 논쟁은 1976년까지 이어져 우리 비평사의 한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상현(李相鉉)은 「동시의 기능분화」(《문학사상》1975. 6)와 「네거티브적 시론을 추방한다」(《한국문학》1975. 10)로써 서민문학론을 정면 공격하였고, 박경용은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 요인」(한국일보 1976. 5. 5자)에서 이오덕의 논조를 온건하고 간접적으로 비판했으나 곧 치열한 직접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이오덕의 주요 비평은 「시 정신과 유희정신」(《창작과비평》1974. 가을), 「부정(否定)의 동시」(『동시, 그 시론과 문제성』한국아동문학가협회, 1975), 「진실과 허상」(《한국문학》1975. 5) 등이다.

이 외에도 이 무렵에는 시비와 논쟁이 도처에 많았다. 1969년 각각 2라운드까지 벌인 박경용과 권용철의 문장 시비, 1970년 손춘익과 윤운강 사이에 있었던 비평의 방법의 시비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러한 시비에는 앞서 말한 두 개의 아동문학 단체(한국아동문학가협회, 한국아동문학회)의 갈등과 암투가 글 싸움을 북돋우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1975년의 「표절동시론」은 법정 시비로까지 번져 당시 매스컴으로부터 아동문학 단체의 치사한 갈등의 일면으로 지탄받기도 했다.

이는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측에서 그 해 연간집을 평론 특집으로 발간한 『동시, 그 시론과 문제성』에 이오덕이 협회 소속 시인과 작가들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현주’라는 이름으로 한국아동문학회에 속한 몇몇 시인의 작품이 표절작이라고 폭로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3-2-5 평론지와 논저들

이 시기의 괄목할 특징은 앞에서 말한 비평 활동을 속속 책으로 엮어낸 데 있다. 이는 그 앞의 시기에 보던 학문적 이론서나 입문서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본격적인 비평저작들이 마침내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점일 것이다.

이오덕의 『아동시론』(1973, 세종문화사), 『시정신과 유희정신』(1977, 창작과비평사), 이상현의 『한국아동문학론』(1976, 동화출판공사), 박종구의 『동화의 이론과 실제』(1974, 신망애사), 석용원의 『아동문학개설』(1974, 예문관), 유경환의 『한국현대동시론』(1978, 배영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더욱 주목할 일은 60년대의 《아동문학》에 이어 소년한국일보사에서 초등 교단을 상대로 교육과 아동문학을 다룬 잡지 월간 《횃불》이 1969년 신년호로 창간된 것과 김요섭이 순수한 개인적 능력으로 비정기 간행물로서 《아동문학사상》을 발간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1973년, 송명호를 주축으로 하여 발간했지만 창간호 즉 종간호가 된 《현대아동문학》과 《아동문학(兒童文學)》이 있었다.

그리고 1976년 여름, 계간 《아동문학평론(兒童文學評論)》이 창간되었다.

 

3-2-6 이상현의 『한국아동문학론』과 이오덕의『시정신과 유희정신』

이 두 가지 저작은 이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나온 대표적 평론집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는 본격적이며 순수한 아동문학 비평 논집으로서는 이 나라 아동문학사에서 최초라는 점일 것이다. 이로써 한국 아동문학도 비평이 있는, 그래서 비평적 논집이 책으로 묶여 나올 수 있을 만큼 논의가 상당히 축적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 셈이었다.

이 두 가지 논집은 1970년 초부터 대립적 입장에서 논쟁을 거듭한 평론들을 중심으로 서로 묶었기 때문에 그러한 점에서 매우 흥미 있는 평론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 아쉬운 것은 박경용이 평론집을 내지 않은 점이라 할 것이다. 그는 시인으로서 존재하기를 원하면서 논의에는 마다 않고 나섰으나, 그것은 그때그때마다 나타나는 문제에 대응한 주장일 뿐 영원히 남길 글은 아니라는, 평론에 대한 독특한 시각으로 인하여 저작으로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의 150매 이상으로 보이는 분량의 권두 논문인 「한국 아동문학의 메소포타미아」는 한국 아동문학사를 단순 신화 시절부터 고찰한 문학 통사적 약사(略史)로서 아동문학 연구로서는 처음 시도된 것으로 주목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한국 아동문학사는 근-현대사에 머물러 있었던 점으로 생각하면 괄목할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학자도 아닌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이만한 연구물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저자의 아동문학에 대한 각별한 집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논문이 발표되던 그 해 일본의 월간지 《친화(親和)》 1975년 6-8월호에도 번역 소개되었음을 머리말에 소개하고 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앞에 소개한 이상현의 평론집이 학문적 이론이 섞여 있었던 데 대하여 철저히 창작 현장의 문제성에 입각한 비평적 신념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그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일관된 태도는 창작의 형식이나 양식, 구조 등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하고 있으며 주제 의식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주제는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이를 위로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어린이를 만들어낸 사회 체제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는 저항적 의식을 어린이에게도 갖게 하여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것이 그의 서민 문학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달프고 모순적인 농촌 현장에서 자라는 어린이의 실상이 표현되지 않고 예술입네, 동심입네, 아름다움입네 하는 것은 시인의 허위의식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이 논집은 아동문학 문단에 소위 훗날 삶의 문학을 표방하면서 문학을 오로지 운동적 차원으로 이끌어가는 이년적 경향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텍스트가 되었다.

 

3-2-7 월간 《횃불》과 비정기간행물《아동문학사상》

월간《횃불》은 소년한국일보에서 조풍연의 주재(主宰)로 1969년 1월에 창간되어 이듬해 5월호까지 통권 17호를 낸 단명한 교단 잡지였다. 초등학교 교사를 상대로 한 종합 교양지 성격을 지녔으나 아동문학에 큰 비중을 두고 제작되었으므로 문학사적 관심이 되는 잡지라 할 수 있다. 매 호 160-170쪽으로 된 이 잡지에서 눈길을 끄는 특집으로 전대웅, 이응창, 신현득, 윤운강 등이 집필한 「색동회」(5호)와 같은 글이 몇 차례 있었으나 이 잡지는 특집을 거의 다루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대신 중요한 연재물로서 창간호부터 이재철의 「한국현대아동문학사」와 정한모의 「작문 교육을 위한 문장 강화」등이 있었으나 잡지 폐간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거의 매 호에 실린 작가론은 훌륭한 비평적 자료가 되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추려보면, 김종길의 「박영종(목월)론」(창간호), 이종기의 「이원수론」(2호), 전대웅의 「이응창론」(3호), 석용원의 「장수철론」(4호), 원응서의 「박경종론」(5호), 안춘근의 「이주홍론」(8호), 윤혜승의 「김성도론」(9호), 유경환의 「어효선론」(13호) 등이 그런대로 읽을 만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대상이 된 이를 위한 필자는 서로 인격적으로 친분이 있는 이를 골라 쓰게 한 탓인지 비문학적 접근에 의한 인간적 면모를 스케치한 것도 적지 않았다. 작가적 평가를 다룬 글이라 할지라도 두둔하고 추켜 주고자 하는 시각으로 스고 있어서 엄격한 비평문이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비평적 입장에서 주목이 되는 글은 박경용(2-14호)과 임헌영(15호 이후)의 월평, 조풍연의 「아동문학의 한일관계」(2,3호), 박경용의 「국어교과서에 실린 동시 평가」(3호), 주평의 「동극각본의 대사 구사법」(4호), 이하윤의 「비교문학과 한국 아동문학」(5호), 정창범의 「동화와 아동의 인격형성」(6호), 안수길의 「동화와 소년소설」(6호), 권용철의 박경용의 월평에 대한 반론으로서 「정확한 객관적 안목」(13호) 정도가 있었다.

이른바 무크지 《아동문학사상》은 1970년 6월 「환상과 현실」을 특집으로 하여 제1호를 내면서 시작하여 1974년 7월 10일까지 10호를 낸 것이 확인된다. 이 잡지는 출판사 집현전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김요섭 개인적 노력으로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아동문학에 관한 이론을 중심으로 하여 편집이나 체재도 전혀 새롭고 획기적인 의도를 나타내어 책 자체의 체재부터 세련됨을 보였다. 종래 아동문학 관계 잡지로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는 매호의 내용 자체가 시기성을 띠지 않고, 특집을 마치 단행본처럼 책명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견 단행본 시리즈처럼 보이게 외양을 꾸몄다. 그리고 월간지나 계간지처럼 발행 월호를 표시하지 않았다.

책명으로 삼은 매 호의 특집 제목을 보면 「환유와 현실」(1호-1970. 6), 「창작기술론」(2호-1970. 10), 「안데르센 연구」(3호-1972. 2),「어머니 사랑」(4호-1971. 5), 「문학교육의 건설」(5호-1971. 8), 「셍텍쥐페리의 연구」(6호-1971. 11), 「동요와 시의 전망」(7호-1972. 3), 「전래동화의 세계」(8호-1972. 7), 「안데르센 작 ‘그림 없는 그림책’ 연구」(9호-1973. 4), 「현대 일본 아동문학론」(10호-1974. 7) 등이다.

매우 독특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집중적으로 천착한 이 평론잡지는 기본적으로 아동문학의 예술적 장르의식에 관점을 두고 예술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기본적 문학 신념을 실천한 것이었다. 이것은 아동문학의 환상성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3-3. 비평전문화기(1976~1990)

3-3-1 1976년과 이후 15년간의 의미

계간 <아동문학평론>과 월간 <아동문예>가 창간된 1976년은 한국 사회 변혁기와 맞물린 한국 아동문학 사상(史上) 매우 독특한 시기다. 광복 이후 45년 동안 사회적 변동이 거의 15년 단위로 크게 세 번 쯤 있었다고 보았을 때, 이 해는 그 세 번째 주기가 시작되는 첫해인 것이다.

광복과 더불어 맞은 5년간의 해방공간에 이어 6.25전쟁으로 시작된 50년대의 10년간은 민족적 참상과 혼란의 질곡 속에 절대 빈곤의 세월이었다면, 4.19와 5.16으로 그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질서로써 산업화의 계기를 이루었던 60년대 이래의 15년간은 군사 독재라는 그늘과 빈곤의 틀을 깨부수고 부흥의 계기를 이룬 볕의 세월로 명암과 음양이 뚜렷하게 겹친 세월이었다.

그런데, 70년대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는 세 번째의 15년간, 이른바 제3의 시대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구는 수도를 비롯한 대도시로 집중되고 인구가 집중된 도시에는 주택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아파트로 요약되는 주거 환경의 일대 변화를 경험하면서 사회적 구조와 의식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가 된다.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치열한 민주화의 열기로써 정치적 저항 운동이 대학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는 이념적 좌파라고 할 수 있는 민중주의 내지 좌파 민족주의 등으로 우회하여 급기야는 맑시즘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친북 성향의 정치 운동이 수면 위로 드러낸다.

이러한 사회적 변혁은 자연히 아동문학 현상에 반영되거나 영향일 입혔다.

1) 이념적 입장을 지닌 일군의 아동문학가는 일반 문학의 민중주의 문학과 연계를 가지고, ‘글쓰기 교육’ 운동과 더불어 문학 활동을 문학 운동으로 전개하는 집단을 형성하여 나타났다.

2) 기존 아동문학 문단은 셋으로 나누어지고 이의 각 단체 사이에 세력 늘리기 위한 신인을 경쟁적으로 배출하는 역기능이 나타났다.

3) 아동문학의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이가 나타났다.

4) 아동문학을 학문으로 전공하는 이가 늘어났다. 석-박사 학위자가 계속 배출되었다.

5) 아동문학의 활동도 마침내 국제적인 시야와 범위를 모색하게 되었다.

6) 각 장르별로 모험심 많은 신인들에 의해 새로운 양식이 속속 실험되고 동시건 동화건 가리지 않고 작품의 대형화가 뚜렷해졌다.

7) 아동문학 작품집, 엔솔로지, 동인지 등이 활발하게 간행되었다.

 

 

3-3-2 계간 <兒童文學評論(아동문학평론)>과 아동문학의 본격 비평

1976년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동문학 전문지 월간<아동문예>는 그해 5월호로써, 함께 계간 <아동문학평론>이 여름호로써 창간되었다. 특히 계간 <아동문학평론>의 창간은 아동문학 비평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 잡지는 여러 해 동안 이재철의 개인적인 사재(私財)를 털어 발간되었다. 지극히 제한된 독자를 상대로 영리적 경영이란 애당초 상상할 수 없는 특수 잡지였기 때문에, 대부분 기증본으로 소비되면서도 발행자의 아동문학에 대한 집념으로 버티어 나온 것이다. 그것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집념과 열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발행되어 온 잡지는 1986년부터 명목상의 발행자가 바뀌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문예진흥원에서 원고료 지원이 얼마간 있었지만 그것은 해마다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매년 다른 여러 잡지와 함께 비교 평가하여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해걸이 하듯이 지원되었다.

초기부터 한동안 100-120쪽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1986년부터 160-170쪽으로 증면되었다. 38호부터는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체제로 바뀌었으며 54호부터는 사진 식자 체제로 바뀌면서 책의 크기도 신국판으로 커졌다. 그 사이 한동안 순 한글로만 쓰던 한 때가 있었으나 한자 혼용의 보수적 편집 방침은 창간 이래 40년이 가까워오는 2천년대에도 변함이 없다. 특히 이름은 필자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한자로 표기하는 고집을 지키고 있음도 주간의 개성이다.

그 사이 이 잡지가 있음으로 하여 비평사적으로 주목할 점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아동문학에 대한 비평이 일상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 잡지가 존재하고부터 비평이 정기적이며 고정적인 형태로 항시 존재할 수 있는 지면이 마련된 것이다. 이 잡지를 뒤이어 나오는 아동문학 전문지들도 아동문학 비평을 상설하게 되었으며 일반문학만 다루던 문협기관지인 월간문학도 아동문학 월평이 상설되었다.

 

2) 전문 비평인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글에 어설픈 신상 발언 같아서 좀 어색하지만 이 글을 쓰는 나도 바로 이 잡지를 통하여 데뷔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는 이 나라 아동문학 사상 아동문학 비평을 전문으로 하겠다고 정당한 관문을 통과하여 데뷔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창간 이래 이 잡지가 발굴해낸 아동문학 비평가는 2009년 5월 현재 35명이나 된다. 물론 반드시 양적으로 많다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아동문학을 연구하고 비평하겠다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아동문학의 발전과 함께 비평의 발전을 위하여 결코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3) 본격 작가론이 기획 특집으로 꾸준히 다루어졌다.

1981년 봄부터 1986년까지 계속된 일련의 기획에서 주간인 이재철이 직접 쓴 작가론은 「이원수의 문학세계」(18호)부터 시작하여 이종택(22호), 윤석중(27호), 박화목(28호), 김성도(31호), 최효섭(33호), 박경종(34호), 장수철(35호), 어효선(36호), 최태호(37호), 신지식(39호) 등으로 이어졌다. 이 사이 이 기획에 참여한 작가론으로는 권용철의 김요섭론(23호), 박경용의 조유로론(25호), 손동인의 이주홍론(26호) 등도 있다. 이 기획은 한 참 쉬었다가 최지훈의 조풍연론(47호Z)으로써 1988년 여름에 실질적으로 마감했다.

그리고 기획과 관계없이 발표된 시인론으로서 1987년에 연재되었던 정원석의 어효선론(42-44호)과 김용희의 「신현득 론-나날이 새로운 삶을 향한 모색」(50호)이 그 성실한 논지로 하여 돋보이는 비평이라 할 수 있겠고, 신인 비평가 추천 작품으로는 유영희의 최태호론(32호)이 눈에 띈다.

또 시인, 작가가 작고할 때마다 그의 생전에 남겼던 문학적 업적을 정리하려고 애를 씀으로써 발표된 작가(또는 시인)론으로서는 이재철, 김성도의 류여촌 론(24호), 이효성의 강준영 론(29호), 김용희의 윤부현 론(38호), 김학선의 손수복 론(41호), 엄기원, 엄성기의 김원기 론(48호) 등이 있다.

1988년 겨울호부터 본고 필자의 집필로써 마련된 기획 시리즈 「이 시대의 아동문학가」는 현역 아동문학가 중에서 당대 아동문학의 흐름에 주도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아동문학가를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기획이다. 앞서 수년 간 계속 되었던 아동문학가 연구 기획이 활동을 쉬고 있는 이른바 퇴역 원로들의 업적―그것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된―을 사적으로 정리하는 시각에서 다루었다면, 「이 시대의 아동문학가」는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시인, 작가를 상대로 현재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다루어진 아동문학가는 1990년 여름까지 권정생(49호), 정채봉(52호), 김종상(53호), 김녹촌(55호) 등이다.

 

4) 아동문학의 진로를 제시하는 기획과 특집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잡지가 창간 이래의 주요 특집이나 기획물을 살펴보면 별표 자료1)과 같은 글들이 있다.

 

5) 드러나게 활동을 보이면서 관심을 집중시키는 동인과 작가 시인을 부각했다.

1986년부터 약 2년간 계속되었던 「동인의 현주소」에서는 한뜻모임(39호), 동심의 시(40호), 방울나귀(41호), 동요동인회(42호), 써레(43호), 솔바람(44호), 흙담(45호) 등 독특한 개성과 활동을 보여준 소규모 동인들에 대한 활동이 소개되었다.

또 1987년 겨울호(45호)부터 1990년 여름호(55호)까지 중견급 아동문학가로서 창작 활동이 활발하거나 개성적인 문제 의식을 지닌 작품을 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이들을 골라 그들의 신작을 집중 소개하여 평가하고 있는 「집중조명」은 동시인으로서 박덕은, 김재수, 권기환, 최승렬, 이준관, 하청호, 공재동, 노원호, 박두순, 이준섭 등이 소개되었고, 동화작가로서는 김학선, 배익천, 김상삼, 소중애, 류근원, 장문식, 김여울 등이 소개되었다.

 

6) 한 시대의 한국 아동문학인들이 갖는 문학적 총괄적 평균적 가치관을 가늠하게 했다.

이 잡지가 창간 이래 30주년이 되는 2005년까지 발표된 비평적 산문들의 필자와 그 글의 제목을 목록해보면 다음과 같다.(별표자료2))

이는 1976년부터 30년간의 한 세대에 걸친 것으로 문학사의 한 시대적 단위를 보여주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전문비평가가 등장하기 시작하여 후반에 이르면 아동문학도 다른 문학 분야와 다름없이 본격 비평의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그 사이에 비평가가 아닌 일반 작가와 시인들도 비평적 발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잡지는 개방하고 있었으므로 수많은 아동문학들이 제 나름의 문학관을 피력해 보이고 있다. 이는 이 나라 아동문학에 참여하는 이들 전체적인 의식을 총괄적 또는 평균적 가치관을 들여다 보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 있는 작업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아동문학평론》이 발간되면서 가장 두드러지고 아동문학 문단에 가장 큰 반향과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뭐니뭐니해도 계절 단위로 그 기간에 발표된 아동문학 작품들을 총괄적으로 비평한 <계간총평>(이하 ‘계평’)이라고 할 것이다.

이 잡지 창간호에서 계평 필자로 스타트를 한 이는 동화에 한상수와 조대현, 동시에 유경환과 윤부현이었다. 한상수는 창간호와 제3호(1976. 겨울)에 발표하고 이후 발표하지 않았으며, 조대현은 첫 1년간(창간호~4호) 계속 집필하고 몇 해 지난 14호(1979. 가을)에 발표했다. 동시 계평자인 유경환은 창간호, 제2호(1976. 가을), 제7호(1977. 겨울) 그리고 제23호(1981, 겨울) 등 드문드문 집필했으며, 윤부현은 창간호부터 제4호까지 1년을 온전히 채웠다.

이후 계평의 필자들은, 강준영(姜俊榮) 경철(景鐵) 고성주(高成柱) 공재동(孔在東) 권영상(權寧相) 권영세(權寧世) 권오삼(權五三) 권용철(權容徹) 김경중(金京中) 김관식(金寬植) 김문홍(金文弘) 김병규(金炳圭) 김봉석(金鳳錫) 김사림(金思林) 김상삼(金相三) 김영관(金榮寬) 김용희(金容熙) 김원기(金元起) 김재창(金載昌) 김종헌(金鐘憲) 김진광(金振光) 노경수 노원호(盧源浩) 문삼석(文三石) 박경용(朴敬用) 박덕은(朴德垠) 박두순(朴斗淳) 박상재(朴尙在) 박성배(朴聖培) 박신식(朴信植) 박재형(朴在亨) 박종현(朴鍾炫) 손광세(손영일) 송재찬(宋在贊) 신충행(辛忠幸) 신현득(申鉉得) 신형건(申炯健) 심후섭(沈厚燮) 엄기원(嚴基元) 오순택(吳順鐸) 원유순(元裕順) 유재복(柳在福) 유창근(兪昌根) 유한근(兪漢根) 윤삼현(尹三鉉) 윤이현(尹伊鉉) 이도환(李道煥) 이상배(李相培) 이석장(李錫章) 이재철(李在徹) 이정석(李正錫) 이준관(李準冠) 이효성(李曉成) 장문식(張文植) 전병호(全炳昊) 전원범(全元範) 정진(鄭珍) 정목일(鄭木日) 정선혜(鄭善惠) 정연지(정춘자) 정진채(鄭鎭埰) 제해만(諸海萬) 차보금 최용(崔湧) 최지훈(崔志勳) 최춘해(崔春海) 하청호(河淸鎬) 홍기(洪淇) 황정현(黃正鉉) (이상 창간 30주년 기념호/2006년 봄호 때까지의 필진으로 가나다 순) 등이 집필에 참여했다. 동화작가는 동화를, 동시인은 동시를 비평했으나 비평가는 대개 양쪽을 겸했다. 이들 중에는 여러 해를 걸쳐서 참여한 이도 있고 단 1회만 쓴이도 있다.

이들 중 정진채, 김문홍, 이정석, 공재동, 하청호, 손광세, 최지훈, 오순택, 노원호, 박두순, 박성배, 김봉석, 최춘해, 장문식, 심후섭, 이도환(이상 집필 빈도순) 등은 비평적 안목과 식견이 인정되어 장기간 또는 자주 계평 필진으로 참여했다.

 

70여 명의 아동문학가가 참여해서 동료 아동문학가의 작품을 재단하는 일은 인간적으로 난감할 수도 있고, 그러므로 자칫 서로 추켜 주기식 비평이 될 수 있다는 염려를 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계평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러한 면은 거의 기우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즉, 계평자들은 진지한 자세로 가급적 광범위한 발표지면을 두루 살펴서 그 시절에 유난스럽게 주목을 끌게하는 작품을 선별해서 자신의 문학적 미학 관점을 잣대로 비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사람에 따라서는 비평자들이 설익은 제멋대로의 주관적 잣대를 휘두른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오늘에 이르러서 살펴보면 그러한 것이 오히려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적지 않은 아동문학가들이 참여해서 제나름대로의 발언과 가치관을 펼쳐보여주기 때문에 다양한 가치관을 두루 확인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같은 작품을 두고도 각각 다른 평가를 하는 계평도 읽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점에서 오히려 유익한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많은 집필에 참여한 이는 대충 다음과 같다.

계평과 함께 해당 계절 기간에 발행된 아동문학 신작 창작집에 대한 서평도 꾸준히 발표했다. 이 서평에 참여한 아동문학인도 계평이나 일반 비평적 산문(평론)의 필진과 당연히 겹치기도 하겠건만 상당히 차별화됨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계평은 한 기간 동안 발행된 문학지를 두루 섭렵하고 거기 발표된 작품을 확인하여 읽어야 하는 작업으로써 잡지 편집 데스크에서 지정해 주는 필자가 쓰게 마련이지만, 서평의 경우 상당 부분이 기고에 의한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서평의 경우는 데스크에서 필자를 지정하여 청탁하는 경우도 많지만 기고의 개방성을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에 필진이 매우 다양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 글들은 필자에 따라 독서감상문이나 해설의 수준에서 당당한 작품론에 해당하는 글 등으로 그 질이나 표현 양식에서 상당히 편차가 두드러진다.

다음은 창간호로부터 120호에 이르기까지 서평을 한 차례 이상 집필하여 발표한 필진은 별표 자료와 같다.

 

 

3-3-3 아동문학 연구의 확산

이 시기에는 이재철 자신의 노력으로 ‘이재철 1인 연구시다’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는 그 전대에 교육대학을 중심으로 아동문학 연구가 횡적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했으나, 교육대학 교육과정에서 아동문학이 필수화되지 않게 됨에 따라 학문으로서 외면당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 대구교육대학을 떠나 상경하여 아동문학 연구를 위한 수년 간의 자료 수집 끝에 이를 바탕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외로운 투쟁을 하듯이 홀로 아동문학 연구에 몰두, 1978년에는 마침내 한국 초유의 방대한 저작인『한국현대아동문학사』를 완성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른바 아동문학으로서 박사가 되기는 아마 세계 최초의 기록이 아닌가 한다. 이래로 그는 아동문학을 학문으로 전공한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다시 골몰하기 시작했다. 계간 《아동문학평론》을 통해서는 아동문학을 위한 평론가를, 대학원 강단에서는 전공 학자를 배출하고, 대학 국문학 과정에 아동문학을 설치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하여 1980년대 들어서면서 단국대학교 뿐만 아니고 그가 출강하는 대학이나 이웃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까지도 아동문학을 택하여 그의 지도나 심사를 받아 학위를 받는 경우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적 노력과 성과에 자극을 받아 대전의 한상수, 광주의 전원범, 전주의 김경중 등이 아동문학을 전공하여 박사가 되거나 박사 과정을 준비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교육대학 시절인 횡적 연구 확산에는 실패했으나 80년대에 들자 그를 정점으로 하는 종적 학맥이 형성되기 시작할 만큼 아동문학 전공자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이후 계속된 대학원 전공자는 해가 갈수록 늘어나서 석사 학위자는 물론이고 박사학위자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게 된 것은 이미 몇 년이 지났다.

이는 대부분 이재철 교수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지도를 받거나 학위 논문 심사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학위 논문 목록-별표 자료 참조)

 

그러나 이재철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 다시 이를 바탕으로 학문의 확산을 재시도하기 위해 1988년 한국아동문학학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한국 아동문학 연구를 국제적으로 연대하기 위해 아시아 아동문학대회를 창설했다. 즉, 1990년 8월 9일부터 11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서울(라마다 올림피아 호텔)에서 ‘산업화 시대의 아동도서와 아동문학’이라는 주제로 한국, 중국, 일본 3개국 아동문학인이 참여하는 대회를 개최했다. 이를 위하여 이재철(李在徹)은 6년간 준비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후 이 대회는 격년으로 일본, 중국, 대만 등지를 순차적으로 순회하면서 2008년 여름 대만에서 제9차 아동문학대회를 가졌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제1차 창립 대회 뿐 아니라 제4차(1996)와 제8차(2006)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었다. 서울의 나중 두 대회는 세계아동문학대회를 겸했다. 그 사이 아시아 아동문학 대회에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이 주축이 되어 왔고, 그 외 동남아, 몽골,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대표자들을 보내 왔었다. 세계대회에서는 미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해서 구미 각국에서 대표자를 초청했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아동문학 현황과 아동문학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세계에 알리고, 세계적인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응 내지 동참할 수 있게 했다. 아동문학에 관한한 한국과 세계의 소통이 정례화 되게 한 것은 한국 아동문학 발전을 획기적인 단계로 끌어올린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재철 교수는 그 동안 개인적으로 수십년간 수집 소장한 한국 현대 아동문학에 관련된 자료를 아동문학 연구를 위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독일이나 일본처럼 국제아동문학관을 마련하고자 여러 해를 두고 소망하며 설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자 차선책으로서 적절하게 학계에 환원하는 방법을 찾던 중 경희대학교에 아동문학연구센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3-3-4 『한국현대아동문학사(韓國現代兒童文學史)』

이재철의 『한국현대아동문학사』는 1978년 일지사에서 출간되었다. 국판(A5) 6백여 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저작은 저자의 박사 학위 논저로 간행되었다. 이는 그가 아동문학을 학문의 전공으로 삼은 지 15년 만에 이루어낸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선행 연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요, 이 방면의 전문학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고독한 학문적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이룬 개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머리말에서 ‘일찌기 주 전공이던 시와 소설 연구를 둘째로 돌리고 아동문학 연구에 손을 대었을 때, 남아 평생의 작업으로 만류하던 은사, 선배, 동료, 후학에겐 이제야 그만한 해답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면 그 또한 망외의 즐거움이다.’라고 쓰고 있다. 말하자면 이 저작은 결코 대학의 강좌를 메우기 위하여 어설프게 엮은 교재용이나 강의록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이 논저를 보게 되면 한국 근대문학사에 왜 아동문학이 빠져 있었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저작물을 보면서 아동문학도 한국 문학의 자산을 더욱 풍요하게 하는 자산이며, 그 문학사는 한국 문학사를 더욱 알뜰하고 충실하게 하는 구실을 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아동문학이 빠진 문학사는 이제 문학사의 한 귀를 분명히 빠뜨린 것이 된다는 엄연한 증거로서 이 저작은 값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는 한국 현대 아동문학사의 기점을 1908년 육당의 《소년》의 창간으로 잡고 이후, 80년간의 역사를 다시 광복의 1945년을 중심으로 그 이전을 ‘아동문화운동시대(兒童文化運動時代)’로, 그 이후를 ‘아동문학 운동시대(兒童文學運動時代)’로 크게 이(二) 구분하고 있다. 이렇게 ‘두 시대의 설정은 전자의 시대가 아동문학을 통한 문화운동적 성격이 지배적이었고 문화적 활동의 가치 교범이 계몽적 문화운동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후자의 시대는 이를 극복할 여건에서 전개되는 아동문학의 예술적 차원을 고양시키기 위한 문학운동사적 성격이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이구분(二區分)한 시대는 다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세분했다.

I. 아동문화 운동시대(兒童文化運動時代, 1908-1945)

1. 현대 아동문학의 태동(1908-1923)

2. 형성의 양상(1923-1930)

3. 문학성의 발아(1930-1945)

II. 아동문학 운동시대(兒童文學運動時代, 1945-현재)

1. 진통 속의 모색(1945-1950)

2. 대중취향의 팽창(1950-1960)

3. 본격 문학의 전개(1960-현재)

이에 따라 전개한 저작의 내용을 역시 그 목차에 의해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크게,

•서론

•아동문화 운동시대(전4장 16개절)

•아동문학 운동시대(전3장 12개절)

•결론

등 4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아동문화운동시대의 1~3장은 앞에 소개한 시대별 내용이며, 4장은 아동문화 운동시대의 결산으로 되어 있고, 아동문학운동시대의 1~3장도 역시 앞에 소개한 시대별 내용으로 되어 있다.

 

 

3-3-5 『세계아동문학사전(世界兒童文學事典)』

1960년대 후반에 아동문학 연구를 시작하여 한 세대의 기간에 해당하는 30주년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아동문학 연구는 ‘이재철 1인 연구 시대’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고군분투로 쌓은 연구 업적을 드러내는 여러 저작물 가운데에서도 『아동문학개론』,『한국현대아동문학사』와 함께 『세계아동문학사전』은 그의 3대 저작으로 꼽을 수 있다. 문학과 예술에 관한 학문을 전공하겠다 하고 어느 장르에서든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텍스트가 바로 개론(槪論)과 사론(史論)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학문에 관련된 전문 사전(事典)은 당연히 필비의 자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전무했던 아동문학을 위한 학문 세상에 이를 위하여 확실한 정본(正本)이 되고도 남을 텍스트를 이루어냈다는 것은 아동문학 학문의 기초를 홀로 완벽하게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아동문학사전』은 1989년 계몽사에서 냈다. 국배판의 668쪽, 이는 사계(史溪)가 아동문학 연구를 시작한지 4반세기만에 필생의 연구 성과를 총정리하고 마감한 쾌저다. 그것은 편저자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발간 당시 기준으로 70년 한국 아동문학사에도 확실한 재산 하나를 이룩한 셈이 아닐 수 없다. 이 방면의 전문 사전을 가지게 된 나라로서는 일본과 독일에 이어 세계 세 번째 나라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수요가 생산을 낳는다는 경제적 원리를 믿는다면 이 사전의 탄생은 곧, 이 나라 아동문학계가 이에 관한 전문 사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더구나 이 사전은 편저자가 위암으로 인한 투병과 수술 끝에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필사적으로 완성하였음에도 다른 두 나라(일본과 독일)의 사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 체제나 외양에서부터 내용적 충실성에 이르기까지 훨씬 앞서 있다고 자부해도 좋을 만하다.

우선 표제 항목이 총 2,700건에 이르며, 풍부한 사진 자료가 동원되었다. 특히 이러한 자료들은 국내외 희귀한 자료, 최신의 자료까지 동원하여 가히 이 방면에서는 당분간 유일한 자료의 원전(原典) 구실을 해내리라고 본다. 물론 이러한 자료 동원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 전체 아동문학가의 협조로써 가능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이 사전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의 장벽이나 편견의 벽을 과감히 극복하고 동서 세계 및 월북 작가와 작품까지도 최대한 자료를 입수하여 고증하고 가치를 평결하여 다루고 있다는 점은 가히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전의 특징의 하나로 꼽을 만한 것은 그 부록과 색인이다. ‘세계아동문학사’와 1980년대의 문학사적 업적까지 등단한 모든 아동문학가에 대한 그 데뷔연도 일람표(연도, 작품, 장르, 등단의 수단 등을 포함), 우리 나라 광복 이후 제정된 각종 아동문학상에서 이를 수상한 수상자 및 수상 작품 일람표, 1920년대부터 발간된 아동문학 관계 저서, 잡지, 신문 등 관계 문헌에 대한 서지(書誌) 일람 등으로 엮어 놓은 것이 무려 2백 여쪽에 달한다. 분량만으로 따질 때 각 항목마다 국판으로 150-200쪽이 이르므로 관계 서적 몇 권을 비치한 효과가 있다.

이 사전이 한국 아동문학을 세계적 위치로 떠올리는 가장 믿음직한 디딤돌이 되리라고 확신하다. 그것은 우리의 절실한 소망이먼서 가장 확실한 기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사전이 출간된 지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2010년 현재) 그 이후 우리 아동문학이 일대 전성기를 맞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속 개정 증보판이나 새로운 사전이 이어 발간되지 못하고 있음은 참으로 유감이면서 이 사전의 귀중함이 더욱 돋보이게 한다.

 

 

 

3-3-6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 운동

이오덕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아동문학가들과 ‘글쓰기’ 지도 교사들의 모임은 이 시기(1976년 이후)에 이르러 더욱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문학과 문학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오덕은 그의 천직으로 삼던 교직을 물러나 2003년 별세할 때까지 본격적으로 문학 운동 현장에서 뛰었다. 그는 전국 각 지역의 초등학교(나중에는 일부 중고등학교 교사들도 참여한다.) 교사들 가운데 진보적 의식을 가진 교사들의 호응을 얻어 한국글쓰기지도교사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글쓰기 교육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라는 명목의 운동 목적을 지닌 아동문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아동문학이 병들어 가는 이 땅의 어린이를 구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문학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특정한 역할과 기능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주장하는 특정한 역할과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아동문학은 격렬하게 비판해 마지 않았다. 그는 어린이들이 쓴 글에 대해서도 특이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이 글을 짓는 기본적 양식이나 틀, 또는 표현에 대한 지도나 평가는 거의 간과하고 오로지 거기에 담긴 내용이 진실한가만을 가지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성인 일반 문학이나 어린이의 글이든 ‘진실’이란 고통스런 바닥의 삶, 고통스러운 일상, 노동의 모습, 어른들이 이루어 놓은 허위나 부조리를 고발한 것만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자연을 보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의 그룹은 이 기간에 『살아 있는 아동문학』(인간사, 1983), 『지붕 없는 가게/이 땅의 어린이 문학②』(지식산업사, 1987), 등의 무크지와 글모음『어린이, 우리의 희망』(이현주 ․ 서정오 엮음, 물레 1987), 『코쟁이네 세퍼트와 판돌이네 똥개』(이현주 ․ 서정오 엮음, 물레 1987) 등을 냈다. 이러한 일련의 간행물들을 통하여 이오덕은 기존의 아동문학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부정했으며, 진보적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정치적 이념을 아동문학으로 표현하는 것을 민족적 자주성에 입각한 문학으로, 또는 정의로운 문학으로, 어린이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용기를 북돋우는 문학으로 높이 평가했으며, 그렇지 않은 문학은 반통일적, 반민주적이라거나 어린이의 영혼을 좀먹는 문학으로 평가절하했다. 그들은 노선이나 평가 기준에 의하지 않은 비평은 비평이 아니라고 하며 이 땅에는 진정한 아동문학 비평도 없으며, 비평가도 없다고 강변했다.

이오덕의 두 번째 평론집인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백산서당, 1984)은 그의 그러한 이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원수 문학에 지나치게 경도하여 기회만 있으면 이원수 문학이야말로 한국 아동문학의 표준인 듯이 내세웠다. 이 평론집만 해도 20편의 평론 가운데 3편이 이원수론이나 그의 작품론으로서 이 책 전체 지면 분량의 20%를 차지한다.

 

 

 

3-4. 아동문학 전문 비평인들 대거 등장(1990~현재)

3-4-1 비평사 후기 후반기의 특성

1) 아동문학 문단의 여성 물결

1990년대는 한국 아동문학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질 만한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동화문학이 융성해졌고, 아동문학 전문지가 속속 창간되었으며 아울러 아동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젊은 전문 평론가가 대거 등장했다.

그러한 젊은 아동문학 평론가군에는 여성의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세를 이루고 있으며 계속 여성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동문학 문단 자체가 여성화되었다는 현실에서 비추어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평단의 여성화는 아동문학 문단 전체의 여성화에 비한다면 소극적이고 매우 완만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현재(2010년)까지는.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수년 이내에 그 증가세가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현재 각 대학의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하는 이들 대부분이 여성이다. 그런데 바로 이들은 평단의 절대적인 예비군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1990년대 이후)는 여러 가지로 한국 아동문학의 특성을 말할 수 있는 시대였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특징은 여성 아동문학인 시대라는 것이다. 그 여성의 시대라는 것은 비교 상대적으로 다수라는 정도가 아니라 여성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해서 한국 아동문학 문단의 흐름을 장악해버린 시대라는 뜻이 된다.

젊은 아동문학인은 동화작가이든, 동시인이든, 학자이든 간에 젊은 여성 그룹으로 휘몰아쳤다.

이러한 현상에는 한국 사회 전반에 여성의 물결이 넘실거리게 된 현상의 한 반영이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치원 교단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여성 사회였지만 남성 사회였던 초-중등 교단, 미술과 음악 계통의 예술계와 함께 아동문학 문단은 오로지 여성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지나쳤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2) 아동도서 모니터 능력이 탁월한 젊은 어머니들

여성이 아동문학 문단에 몰려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고 눈에 보이게 뚜렷한 사실은 소위 독서세대라고 불렸던 ‘386’ 세대가 ‘젊은 어머니’로 태어난 때가 바로 이 무렵이라는 것이다. 1960년대 태어난 이들은 여고 시절과 대학생 시절이던 1980년대에 ‘독서하는 여성들’이었다. 이 나라 출판계가 그 무렵 젊은 여성들의 독서 욕구를 채워주기에 바빴었다. 그 세대는 다른 세대나 남성들과는 달리 1980년대에 유별나게 독서욕이 왕성하여 어디에서나 책 읽는 젊은 여성들을 볼 수 있게 했었다. 그들이 어머니가 되자 바로 그 독서 습관을 그대로 자녀들에게 전승시키려고 하게 된다. 그들은 양서를 모니터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만큼 자녀를 위한 도서를 선별하는 눈 또한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의 아동도서에 대한 관심은 유별났다고 할 수 있다.

즉, 자녀들에게 책을 사서 읽히고자 하는 욕구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동아리를 이루어 아동도서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좋은 책을 모니터링하고 그것을 홍보하며, 어린이들에게 직접 독서지도까지 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3) 사업이 된 독서지도 운동

사단법인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와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이 시대에 독서운동의 두 대표적 기관으로 나타났다. 이들 두 기관은 전혀 이질적인 출발과 성격을 가진 독특한 기관이지만 독서지도자를 양성하고, 아동도서를 모니터하여 양질의 아동도서를 선별해서 집중적으로 독서 지도 자료로 선택하는 역할을 해내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좋은 책으로 선정한 것을 그냥 ‘사서 읽어보시오.’하는 홍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관에서 전국적인 망을 가진 독서지도 기관이나 단체를 운영하면서 그 기관이나 단체가 기르고 가르치는 어린 회원들에게 읽히기 위하여 집중 구입 배포하기 때문에 양질의 도서의 유통에 대하여 확실한 창구 노릇을 했다.

이는 종래의 사회사업적 독서 운동이 아니라 바로 수익성을 목표로 한 경영으로서 독서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일종의 출판 권력 행사에 해당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하여 신뢰성이 있는 모니터 활동이 필수적이었다. 그러한 모니터 활동을 위하여 자기 능력 개발과 함께 그러한 젊은 인력을 계속 개발양성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했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게 된 독서지도자들은 바로 아마추어 비평가라고 해야 마땅했다. 이러한 아마추어 비평가들이 대거 양성되는 풍토에서 아동문학 전공 대학원 과정까지 거치게 되니 당연히 우수한 아동문학 비평가가 배출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4) 아동문학 전문지의 족출(簇出)과 평단의 좌우 이념적 형성

1990년대를 전후하여 아동문학 전문지가 잇달아 창간되었다는 것은 비평적 환경을 위하여 가장 바람직 현상이었다고 할 것이다. 특히 2003년 여름, 진보적 민족문학을 기치로 내세운 문학계간지 《창작과비평》사에서 자매지로 《창비어린이》가 창간된 것은 아동문학 평단을 좌우로 확실하게 구분지어 활동하고 발언하는 장으로서 역할을 하게 했다. 물론 이오덕 이래로 진보적 사실주의 내지 서민-민족 등을 내세운 좌파 이론과 주장과 비평이 있어 왔으며 그의 문학적 이념과 가치관을 추종하는 젊은 비평가들이 1990년대 들어서면서 나타났었다. 그러나 그들이 고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지면으로서 잡지의 탄생은 그들의 활동을 본격화하고 현실화하는 구실을 충실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동문학 전문지는 《창비어린이》이전에 여러 잡지들이 탄생하여 발행되었었다.

이미 계간 《아동문학평론》과 동시에 창간되어 1990년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15주년을 맞아 통권 180호를 넘기고 있던 월간 《아동문예》가 있었고, 지방인 함평에서도 월간《아동문학》이 발행되고 있었다.

1995년 봄호를 창간호로 한 계간《아침햇살》, 1997년 가을호를 창간호로 한 계간《시와 동화》, 1998년 겨울 동화와 동시 작품만으로 엮어 비평과는 인연없이 발행되던 《열린아동문학》, 2003년 봄, 동시문학만을 전문으로 하는 《오늘의 동시문학》 등이 발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 2008년 봄부터 《어린이책이야기》가 발행되고 있다.

한편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기관지로서 월간 《어린이문학》이 여러 해 발간되었으나 종간되고 이의 발행 이념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면서 단체의 기관지가 아닌 개인적 운영체재로 월간《어린이와 문학》으로 발행되고 있다.

이러한 잡지들은 각자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으나 결국 이념적인 성향에 따라 우파인가 좌파인가로 구분된다. 무색-불편(不偏)-통합(統合) 등을 내걸기도 하고 또 그러한 이념에 무관하다거나 또는 어느 쪽에도 기울이지 않고 두루 열어놓고 있다는 태도를 내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사이에 알게 모르게 양쪽 이념 색채의 안경으로 들여다 보게 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3-4-2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들과 평론집

계간《아동문학평론》은 신인 등단 과정을 열어두고 있는데 특히 비평가를 길러내고자 하는 주간의 의지로 비평가가 꾸준히 배출되었다. 특히 주간이 대학에서 직간접적으로 지도한 석사 학위자들이 비평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권장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비평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이들로 최지훈의 뒤를 이어 김용희, 정선혜, 최용, 최명표 등이 있다. 경철, 김경중, 정연지, 김학선, 채찬석 등도 한 동안 열심히 활동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활발한 현역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

그 이후에도 신인들은 계속 배출되어 김현숙, 선안나, 이정석, 전명희, 이도환, 황혜순, 박영기 등이 활발한 제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 아동문학 비평계의 새바람이 될 것으로 믿을 수 있다. 박상재는 《아평》신인상의 관문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아동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아평》편집장을 맡으면서 비평 활동을 했다.

이미 앞서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전문 평론가 그룹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일반 창작인들, 특히 동시인들 중에 비평 활동을 전개해온 논객들이 적지 않다. 박경용, 이상현 등과 진보적 입장에서 권오삼 등의 동시인들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하청호, 이준관, 전병호 등도 정연한 논리로 미학적 가치관을 바로 세워 평론가보다 더 전문적으로 적지 않은 발언을 표출했다.

한편 이오덕의 문학적 이념과 가치관을 따르거나 동조하는 대부분의 진보적 아동문학인들은 《아평》을 거치지 않고, 대학(주로 교육대학교)의 젊은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자발적으로 지면을 통하여 비평 활동을 전개해 왔는데 그 대표적 평론가로 이재복, 원종찬, 김상욱, 김이구, 김경연, 김제곤, 조은숙, 김경연 등이 있고 최윤정과 그림책 전문의 엄혜숙과 이지유 등도 손꼽을 수 있다.

 

이렇게 전례 없이 많은 비평가들이 등장하면서 당연히 평론집들도 잇달아 상재되었다.

최지훈도 평론 활동을 시작한 지 15년이 지나서 첫 평론집인 『한국현대아동문학론』(1991, 아동문예사)과 어린 독자를 위한 해설서가 아닌 비평적 에세이를 시도한 『동시란 무엇인가』(1991, 민음사)를 냈으며, 다시 10년이 지나서 『어린이를 위한 문학』(2001, 비룡소)를 냈다.

이를 전후해서 발간된 아동문학 평론 관련 저작물은 별표자료와 같다.

등이 눈에 띈다.

그리고 본격 연구서와 강의용 교재 또는 아동문학 창작 또는 독서지도법 관련 아동문학 강좌용 도서도 잇달아 나왔다.

 

 

3-4-3 북한 문학의 제한적 개방과 『남북아동문학연구(南北兒童文學硏究)

이 시기(1990년대와 그 이후)의 또 하나 특징은 반도 남북 사이에 지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때이다. 남북간의 교류를 타고 북한 아동문학의 실상이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했고, 금지된 월북 문인에 대한 연구나 그들의 저작물에 대한 해금(解禁) 조치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연히 남쪽 문학작품도 비록 선별적이기는 하겠지만 북쪽에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납월북 아동문학가에 대한 연구 열기가 높아지고, 현재 북한 문학에 대한 연구도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연구에서도 이재철은 북한 자료의 대거 입수에 성공해서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시작함으로써 노익장을 과시했다. 대학 강단에서 정년 은퇴하고서도 연구를 계속하여 그가 희수(喜壽)를 헤아리던 때에 일차적으로 『남북아동문학연구(南北兒童文學硏究)』(2007, 박이정)를 펴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터이다. 이 저작물을 내놓을 당시 그의 부인 고 김미자 여사(전 아동문학평론사 대표)가 위독한 와병중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저작물을 여사가 별세하기 직전 그에게 바친다고 했다. 그의 연구는 순전히 병약한 중에도 충심으로 뒤바라지해 준 아내의 덕임을 알기 때문일 터이다.

이 저작물은 그간 북한 아동문학 연구 논문들과 연구 활동 후반기에 저작물에 남기지 못한 일반 연구물들로 엮여 있다. 북한 아동문학 관련 주요 논문을 살피면 「통일시대의 아동문학」, 「남북아동문학연구 1」, 「북한아동문학연구-그 총체적 접근을 위한 시론」, 「북한 동화문학의 비교연구-통일아동문학사를 위한 동질성 모색」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북한 아동문학 연구의 시각은 남북한의 동포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정서의 동질성을 탐색하는데 있음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혈연에 기초한 동족, 동일 조상, 동일 역사, 동일 언어를 가진 민족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이를 고취하는 데 문학 정신을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마무리

지금까지 구구한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아동문학의 비평과 연구는 그야말로 맹아기를 벗어나 본격 비평과 연구의 세월을 지닌 것은 이재철 교수의 아동문학을 학문적 대상으로 연구의 길을 개척한 1960년대 후반에서, 다시 계간 《아동문학평론》이 창간된 1976년부터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은 ‘일인연구 시대’였었고, 비평활동이 시작된 1970년대 후반부터도 한동안은 전문 비평가보다 현역 작가들에 의한 비평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던 것이 1990년대 전후하여 젊은 비평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우리는 좋든지 궂든지 그가 이루어 놓은 바탕 위에 서서 그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후진들은 그에게서 정말 감감한 과제를 떠안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 나라 비평가와 연구자들이 아동문학가들의 활동에 대하여 분석하고 정리 평가하며,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보여주는 일은 궁극적으로 사계(史溪)가 평소 즐겨 쓰는 미래의 시민을 위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연구자들이 또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의 얼굴을 한 이오덕을 만나게 된다. 그 역시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아동문학계에 비평다운 비평이 존재하게 한 선구적 비평가다. 그는 사계(史溪)와는 아주 대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완벽한 학문적 바탕과 빈틈 없는 자료에 근거하여 냉정한 이성으로 문학을 접근하는, 이른바 정통적 자세를 지닌 학자이자 시인이자 비평가이지만, 후자는 학문적 바탕과는 거리가 먼 교육과 사상적 독서를 통하여 얻은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감성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비평가다. 그래서 그의 논리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근사하지만, 그러한 이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거나 탐색하여 이를 그의 논리와 결부시키고 있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재철은 학문적 비평을 연결한 강단 비평적 비평활동을 펴왔다.

이오덕은 일본의 ‘생활작문 운동’의 이론에 심취해 있어서 작문 운동과 문학 운동을 연결짓는 운동가로서의 비평가다.

이재철이 전통적 민족주의와 자주적 신념을 바탕으로 이론을 전개하는 데 대하여 이오덕은 사회적 계급 구조와 부조리를 혁파해야 한다는 진보주의적 신념이 아동문학에도 거침없이 적용될 수 있으며, 외세는 무조건 침략 세력으로 간주하고 적개심을 조장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부처기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렇다고 그의 신념을 반대하거나 비난할 근거나 이유는 전혀 없다. 그의 낭만적인 정의나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리는 문학론은 그대로 문학적 감동 요소이며, 어린이의 참답고 원초적 인간성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곧 문하게 대한 원초적 요구와 일치하므로 그의 주장은 존중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무조건 그가 주장하는 바와 그의 이상과 다르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한다는 것은 극복되어야 할 자세였다. 평화주의를 외치면서 그 평화를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거나, 민족이 통일되어야 한다면서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적대 관계로 문학을 한다면 그 이론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설득력을 잃고 말 것이다.

이제 한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여명의 햇살이 이제 눈부신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갈등을 극복하고 논의 하며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역할에 기여하여야만 우리의 아동문학은 진정한 미래의 세대를 위한 문학으로 승화할 것이다.(끝 이상 본문 255매 & 별표 자료 50여 매 2010.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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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생략)

별표 자료 (생략)

첨부파일 한국아동문학비평사(2010증보).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