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문학
1. 대립과 논쟁을 통한 프로문학론의 전개
1) 문학의 내용 형식론
2) 절충주의 문학론
3) 아나키즘론
4) 목적의식론
5) 대중화론
6) 볼셰비키화
2.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퇴조와 카프의 해체
신경향파 문학이 문단에 확고히 정착되면서 이론과 창작상에 점차 강세를 보임과 동시에 조직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단일조직인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이 대략 1925년 8월 무렵에 결성된다. 〈카프〉는 염군계와 파스큘라계의 합동이었으며 그 구성원은 박영희, 김기진, 이호, 김영팔, 이익상, 박용대, 이적효, 이상화, 김온, 김복진, 안석영, 송영, 최승일, 심대섭, 조명희, 이기영 등이었다. 당시 이들의 통합에는 염군이 적극적인 데 비해 파스큐라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스큐라 구성원들은 이미 기성문인으로《백조》에 이어《개벽》지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특히 유학을 통하여 서구문학을 익히는 등 문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반면 염군의 구성원들은 최승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 문단적 위치에서는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운동에만 깊숙히 관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문단적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이들의 통합을 저지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조선공산당의 창립(1925. 4.17)과 고려공산당의 창립(1925. 4.18)으로 사상운동이 고조되고, 문학적으로는《개벽》(1925.2)지에 특집으로 실린 「계급문학시비론」에 대하여 이광수, 염상섭 등의 비판과 김기진, 박영희 등의 옹호론은 사회주의 이념을 공통적으로 가진 두 단체의 결속을 가져오게 하는 등 객관적 정세와 문단적 분위기는 동일 목적을 위해서 나가는 그들로 하여금 통일된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될 필연을 강요하였다.
1. 대립과 논쟁을 통한 프로문학론의 전개
1) 문학의 내용 형식론
프롤레타리아 문예비평은 처음부터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형식과 내용에 관한 김기진과 박영희 논쟁이 그것이다. 이 논쟁은 대체적으로 김기진이 '어떻게'라는 형식주의에 근거한 문학론을 말했다면, 박영희는 '무엇'의 입장에서, 각기 축을 달리한 주장을 했다. 즉 김기진이 '형식'의 문제로 박영희의 작품에 접근한 반면 박영희는 '내용'으로 대응하는, 주체의 대상이 빗나간 상태에서의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발단은 1926년 11월 《조선지광》에 발표된 박영희의 단편 「철야」를 김기진이 동지 12월호의 「문예월평」에서 "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서까래 없이, 붉은 지붕만 입히어 놓은 건축이 있는가?"라고 비난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평을 요약하면 소설도 여러 가지 재료를 구비하여 균형있게 만든 건축물 같아야 되는데 박영희의 소설은 기둥과 서까래도 없이 지붕만 입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김기진은 어떠한 소설이든 일정한 소설적 형상화와 구성 및 표현 등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김기진의 이와 같은 비평에 박영희는 즉시 '동무 김기진 군의 평론을 읽고'라는 부제를 단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1927.1)를 통하여 "프로작가가 계급의식을 초월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역시 문예비평가도 계급을 초월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김기진의 논의와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이를 비판했다. 김기진은 프로문단도 이제 본무대로 들어섰다고 인식한 데 비해서 박영희는 여전히 투쟁기라는 인식으로 투쟁성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박영희의 반박에 대해서 김기진은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다만 박영희가 "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라는 말을 제멋대로 해석했다고 비판했을 뿐이었다. 결국 문제는 선전문학에 대한 논쟁으로 전환되어 갔다. 그는 「무산문예작품과 무산문예비평」(《조선지광》1927.2)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인정하면서
"특별히 '선전을 위한 소설'이라든가 '선전을 위한 시'라든가 그 외의 무엇이라든가 하는 일종의 문학상 기계론은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거절하며 따라서 무산문예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도 나는 이것을 고집한다. 개념의 추상적 설명만으로 시종하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부르조아 문학에 서도 그러하였음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고 박영희보다 진전된 논리로 반박했다.
이러한 김기진과 박영희의 논쟁은 뒤이어 아나키즘계와 민족주의계 등 전 문단의 쟁점으로 비화되었다. 이들 논쟁의 결말은 이론에 앞섰던 김기진이 당시의 사회적 현상, 즉 문단외적인 사회주의 단체의 압력으로, 동지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논쟁에 권구현, 양주동, 김화산, 염상섭 등이 가담하여 소위 양주동의 '절충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목차로]
2) 절충주의 문학론
'절충주의 문학론'이란 양주동 주재의《문예공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학이론을 지칭하는데, 당시《개벽》을 중심으로 한 계급주의적 경향과《조선문단》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다같이 비판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내걸었다. 양주동이 대표적 이론가였고 여기에 염상섭, 정노풍 등이 가담한 이 절충주의는 '신간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에 따라 계급주의를 안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내건 '민족문학이 곧 무산문학'이라는 절충적 이론이다.
양주동은 "현 단계의 우리는 조선 민족인 동시에 무산계급이요 무산계급인 동시에 조선 민족이 아니냐"며 현 단계의 문학운동 역시 민족문학의 건설과 무산문예의 진출 두 가지가 병행 또는 제휴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염상섭 역시 민족문학과 프로문학의 통합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신문화상으로 보면 민족주의는 자민족의 개성에 중심을 둔 문화 ― 국민문학의 수립을 기도하는 반면에 사회운동 측면에서는 보편적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 ― 계급문학의 고조로서 전통적 관념의 파기 및 개조에 분망하게 된 것도 필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러한 이 두 경향이……피압박 민족의 실제 행동에서 양자가 합동 일치함이 각자의 운동을 일층 권위있게 함이라 생각한다."(「반전통 문학의 관계」,《조선일보》1927 1.15)
양주동은 앞서 살핀 바 있는 김기진과 박영희 간의 내용 형식논쟁에 끼어들어 문학의 기술과 형식을 무시했던 프로문학의 약점을 파고 들어가 자신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즉 김기진이 소설건축론을 통해 형식에 긍정적 태도를 보이자 이를 절충주의로 추켜 올렸다. 그리고 문단을 크게 순수문학파, 순수사회파, 중간파로 크게 3분하고 중간파를 다시 문학적 중간파와 사회적 중간파로 나누어 자신을 우익 중간파, 김기진을 좌익 중간파로 규정하였다. [목차로]
3) 아나키즘론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 있어서 아나키즘 문학론이 차지한 중량은 그 논의의 정도에 비해 그 가치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나키즘론을 제기한 세력이 수적으로 열세했고, 제기된 논의 수준 역시 낮았으며 아나키스트는 〈카프〉의 조직으로부터 축출되는 운명에 처했기 때문에 그 파장은 미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풍미하는 와중에 그것을 비판하고 나섰다는 점, 그래서 문학에 대한 본질적 문학가의 태도에 관해 잠시나마 성찰하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크게 둘 수 있다.
한국에서의 아나키즘은 김화산, 권구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그 이외에도 임화, 고한용 등이 있다. 그 중에 김화산의 「계급예술론의 신전개」(《조선문단》, 1927.3)는 아나키스트로서의 그가 마르크시즘 문학을 공격하는 첫 평론이 된다.
조선의 사회운동이 거의 전부가 다 노농러시아 계통의 맑스주의에 의하여 지도되는 것과 같이 무산문예운동도 역시 이 맑스주의 내지 막연한 사회주의적 견지에서 창조되어 왔다.
우리는 맑스주의 이외의 견지에서 맑스주의와 병존하는 모든 해방운동사상의 존재를 시인하여 동시에 이 해방운동사상을 출발점으로 삼는 문예운동을 시인한다.
그러나 김화산은 '계급예술의 신전개'라는 제재에 걸맞는 새로운 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단지 계급의식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자신의 단견을 제시할 뿐이었다.
이에 대한 반론은 박영희, 윤기정, 한설야, 조중곤에 의해 제기되어 논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박영희는 직접적으로 반론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었고 '무정부주의적 예언'을 경계하는 어조를 피력할 뿐이었다. 윤기정, 한설야, 조중곤 등에 의한 반격들도 수준에 있어서는 김화산의 것을 능가하지 못했었다. 다만 모두가 김화산의 아나키즘에 대한 이론 제시가 없었다는 것을 공박하고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향한 교란책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할 뿐이었다.
김화산의 아나키스트적 발언은〈카프〉맹원들에게 의식강화를 촉진시켰고 1927년 상반기를 통하여 이러한 논쟁을 치른 뒤 카프는 그 해 9월에 목적의식을 가지고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목차로]
4) 목적의식론
박영희는 김기진과의 형식논쟁에서 자기의 주장이 일단 카프에 수용되자 신경향파의 문예관이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채 '소일거리'가 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문예운동의 방향전환」(《조선지광》1927.4)에서 신경향파 문학을 경제투쟁의 문학으로 동일시하고 이것을 자연생장적으로 파악하며 이것을 정치적 투쟁과 동일시하고 목적의식적 문학으로의 방향전환이 요구되며, 문학은 특히 부르주아를 비롯한 모든 반동적 의식형태와 투쟁하며 폭로함으로써 정치투쟁의 부차적 임무를 맡아야함을 강조했다. 또한 이와 같은 '방향전환론' 아래에서 「문예운동의 목적의식론」(《조선지광》1927.7)을 통해서 목적의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론투쟁의 선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조중곤, 이북만, 한식 등의 제3전선파에 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제3전선파의 대표적 이론가인 이북만은 「예술운동의 방향전환은 과연 진정한 방향전환론이었던가」(《예술운동》창간호, 1927.11)를 통해 "작품행동에만 국한된 운동만으로도 무산계급해방 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공상주의자"라고 말하고 박영희의 주장을 부르조아의 정치폭로, 사회주의 의식의 민중에로 전염, 전선적 진출적 이론투쟁, 이론투쟁 없이 방향전환 불가능 등으로 요약하고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과감한 이론투쟁과 조직운동, 그리고 대중적 투쟁이 병행해야 함을 말한 것으로 박영희의 방향전환론을 정면으로 배격한 것이다.
조중곤은 「비 마르크스주의 문예론의 배격」(《중외일보》 1927 6.18∼22)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은 당의 지령에 의하여 제작해야만 정치투쟁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라 하여 현단계에서는 "공산주의 달성에 대한 공리적 선전적 전투술을 쓰면 그만이며, 좌익적 정견발표문도 예술이며 포스터도 예술"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제3전선파들의 견해는 문예운동이 곧 정치운동이라는 등식으로 성립되어 볼셰비키화로 나가게 되었다. [목차로]
5) 대중화론
대중화에 관한 논쟁은 내용 형식 논쟁의 주요 쟁점이 예술의 정치투쟁의 무기화였다는 점에서 파생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내용 형식 논쟁에서도 "선동의 유일 최선의 방법은 언어와 구체적 표현 ― 그것도 알기 쉽게 해야 한다 ― 을 빌어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하여 이미 문예를 어떻게 해야 대중에게 가지고 가서 선전 선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대중화론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즉, 무지한 대중을 위해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초보적 표현방식으로 투쟁의식을 전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계급문예운동에 있어 '대중화론'의 출현은 김기진의 「사회의식과정에 순응한 예술」(《조선지광》 75호, 1928.1)과 한설야의 「1928년의 대중간의 문예관계는 어떻게 진전될까」(《조선지광》 75호, 1928.1)부터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김기진의 「단편시대관단편 ― 통속소설소고」(《조선일보》1928.9∼20)에서부터 본격화 되었다.
"통속소설의 결정적 요건은 실로 내용 제재-이곳에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보통인의 생활 체험의 한계에서 초월하고 그 사람들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지식-견문에서 초월하는 특수한 사회, 특수한 인생, 특수한 생활, 특수한 학문을 포함한 것은 그들에게 흥미와 이해를 갖게 하기에 어려운 까닭이다. 조선에서 통속소설 독자의 반수 이상이 되는 부인들에게 보이는 소설 속에 세계의 정계(정계)를 가져오고 고상한 학리를 집어오고 하여서야 그것이 읽혀질 리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통속소설은 보통인이 사회와 인생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견문의 한계를 초월해서는 안되고 보통인의 견문과 지식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이다.
"작품은 작중에서 보려고 하던 인물과 그의 행동과 사건을 뒤로 물리치고 작가의 연설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게 되는 까닭으로 가져오던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프로소설의 통속화는 필연적인 것이라 했다.
이렇게 보면 김기진의 논의는 "무지한 대중은 대부분 문맹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문학작품을 가지고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읽고 보는 포스터, 연극, 그리고 시낭송에 집중할 도리밖에 없다."라는 제3전선파의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김기진은 「통속소설소고」에서 프로소설과 통속소설로 이분화하였다. 그런데 바로 뒤에 쓴 「대중소설론」(《동아일보》 1929.4.14∼19)에서 통속소설과는 또 다른 대중소설을 제기했다.
"'대중소설'이란 단순히 대중의 향락적 요구를 일시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오. 그들의 향락적 요구에 응하면서도 그들을 모든 마취제로부터 구출하고 그들로 하여금 세계사의 현 단계의 주인공의 임무를 다하도록 끌어올리고 결정하게 하는 작용을 하는 소설이다."
따라서 독자의 교양정도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소설도 나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소설은 목적과 정신에 있어 동일하고 독자를 기준으로 통속소설은 신문 연재소설을 기준으로 하여 부인, 소학생,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노인, 청년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대중소설은 당대 프로문학운동이 주요 대상으로 하는 노동자 농민, 그 중에서도 이야기책을 읽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을 그 대상으로 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현재 그들에게 읽히고 있는 작품양식을 기준으로 하여 그에 입각한 대중소설을 창작하자고 역설했다.
김기진은 프로시가 문제에 대해서도 '대중소설론'과 같은 취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프로시가의 대중화」(『문예공론』1929.6)를 통해 "어떻게 하면 현재의 프롤레타리아시가를 전 대중 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을까"하는 데서 문제를 출발시키고 그 원인을 '교양의 정도'와 관련시켜, '무지'에 초점을 두고 "그들의 의식과 교양이 저급하므로 그들을 교양하고 그들을 위한 시가를 제작하여야 함"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예술이 전 대중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일부 지식층에만 작용되고, 창작 역시 그렇게 되어왔음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러한 김기진의 '대중화론'은 〈카프〉의 소장파 맹원들로부터 세찬 비판을 받고 논쟁으로 이어진다. 임화는 「탁류에 항하여」(『조선지광』86호, 1929.8)를 통해 형식 등을 문제삼고 "혁명적 원칙의 대담한 왜곡"이라고 말하면서 "작품의 수준을 현행 검열제도하로 합법성의 촉수"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기진은 「예술운동에 대하여」(『동아일보』1929.9.20∼22) 에서 "예술의 형식에 의하여서 대중의 감정과 상상과 정감을 통하여서 그들을 봉건적, 소부르조아적 사상과 취미의 감염으로부터 격리하고 그들의 불평불만을 끄집어내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투쟁의식을 응결케 하여 조직에까지 참여하도록 하되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조건하에서 이 작품행동을 끝내 해나가는 것"이 임무라고 말하며 반박했다. 또 이에 대해 임화는 「김기진군에 답함」(『조선지광』88호, 1929.11)을 통해 "입으로만 프롤레타리아를 연호"하고 있는 '춘향전문학자' '예술지상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섹트주의를 청산하고 가면을 벗으라"고 맹공했다. 이러한 비판은 이미 볼셰비키화 입장에 있었던 임화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김기진은 이에 대해 반론의 자세에서 물러났고 이러한 김기진의 자세는 내용 형식논쟁에서 박영희에게 밀려났듯이 볼셰비키화의 그호를 맞이하여 패배자로 또다시 물러서고 만다. 그리고 대중화 문제는 이후 새로운 군단인 〈무산자〉그룹에 의한 볼셰비키화 대중화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목차로]
6) 볼셰비키화
193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임화를 제외한 새로운 이름의 일군의 신진들이 지면에 나타난다. 이들은 '볼셰비키화'란 구호를 앞에 내세우고 기존 논자들을 과감하게 비판하며 다시 방향전환할 것을 맹렬히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이른바 동경〈무산자〉그룹이다. 이들 〈무산자〉그룹 구성원은 임화를 필두로 하여 안막, 권환, 김남천 등이다. 이들의 논의는 당시 조선공산당과 관련을 갖고 태동되었으며 당대 노동대중의 운동의 진전에 문예운동도 보조를 맞추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서 이들〈무산자〉파는 그 극복방안과 당면방침으로 '볼셰비키화'를 제기했던 것이다. 안막은「조선 프로예술가의 당면의 긴급한 임무」(『중외일보』 1930.8.16)에서 볼셰비키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적 단일한 유기적 메카니즘 가운데에 자기를 결부시키고, 명확한 계급적 기초에 선 조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 적 기구 가운데에 우리들의 예술이 자기의 프롤레타리아트적인 진실이 계 급적인 기초를 가지려는 것을 말함이다."
볼셰비키화에 관한 논의는 기존의 대중화,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예술비평 문제 등도 이 새로운 각도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하여 그 제창과 함께 조직문제와 작품문제를 끄집어내었다.
먼저 조직문제에 관해 임화는 기본적으로 조직의 볼셰비키화를 주장했고 그 조직을 예술운동 전부분으로 확대해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전국동맹을 형성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권환은 지금까지 운동이 활발하지 못했던 것은 직업적 운동가가 적은 데 기인한 바 크다고 분석하면서 조직원의 선택에서 직업적 운동가의 소질을 표준화 해야 한다고 했다.
작품면에서 안막은 과거에 이미 프롤레타리아 예술가의 임무를 규정했었지만 그것은 막연한 의미의 사회민주주의예술이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임무는 볼셰비키적 당 확대, 즉 조선공산당 재건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막은 그 방법으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가장 정확히 객관적으로 현실을 파악하는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을 제시했다. 이러한 점에서 안막은 김기진의 대중화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제창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작품면에서 요구되는 볼셰비키화의 요청은 다시 권환의「조선예술운동의 당면한 구체적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그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관하여, 내용이 혁명적이고 선동적이므로 형식은 직접적이고 그 대상이 노동자 농민이므로 간결 평이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볼셰비키 대중화는 형식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정리된다. [목차로]
2.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퇴조와 카프의 해체
192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 한국의 문단을 장악했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카프〉 자체의 문제와 외부적 압력으로 인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퇴조의 길을 걷게 된다. 1931년에 있었던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은 자국 내 사상탄압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국에서도 사상탄압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카프〉의 이념 자체에 대한 비판도 높아 가는 가운데 이러한 외부적 압력이 겹쳐 〈카프〉의 종말은 예고되고 있었다.
〈카프〉는 1931년 8월부터 10월까지 한위건, 양명 등에 의한 조선공산당협의회 사건과 연루되어 《무산자》의 국내배포와 영화 '지하촌'건으로 인해 임화, 김남천, 안막 등 무산자파와 김남천 등 11명의 동맹원이 체포되는 〈카프〉1차사건을 겪게 된다. 이 사건으로 프로문학인들에게 끼친 정신적 충격은 컸으며 더구나 내적으로 제기된 비판은 〈카프〉를 진퇴유곡에 빠뜨리고 말았다. 박영희가 1931년에 발표한「예술운동의 작금」에 대한 권환의 비난은 박영희로 하여금 간부직에서 사임하게 했고, 신유인과 함께 퇴맹원까지 제출하도록 했으며 1934년 전향론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카프〉에 결정적 충격을 주었고, 1934년 제2차〈카프〉검거사건은 기사회생을 포기할 만한 상황으로 휘몰아 갔다. 제2차〈카프〉검거사건은 소위 '신건설사사건'이라고 불리우는데, 연극 단체인 '신건설'의 용산지구에서 배포한 삐라를 소유했던 학생이 전주에서 체포된 것이 빌미되어〈카프〉전원의 검거로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기영, 한설야, 윤기정, 송영, 이갑기 등23명이 기소되어 그 중 박영희, 이기영, 한설야, 윤기정 등 4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이렇게됨에 따라〈카프〉는 개인활동으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갈 뿐 어떠한 조직적 활동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이 사건은 2년간의 처리과정을 거치는데 이로 인해 전향자가 속출하게 되며, 1935년에는 임화, 김남천 등에 의해〈카프〉해산서가 제출되었다.
〈카프〉의 해산은 1935년 5월 21일 김남천, 임화, 김기진의 협의하에 경기도 경찰부에 해산서를 제출하여 이루어졌다. 표면적으로〈카프〉가 해산되는 형식적인 측면은 이렇지만 본질적인 요인으로는 첫째, 외부적인 요인으로 일제의 탄압을 들 수 있다. 일제의 1,2차에 걸친 대탄압은 전향자를 속출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고 둘째, 내부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노장파와 소장파의 대립은 자신들의 모순점을 현실과의 관계에서 극복하지 못한 결과였다. [목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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